[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흐의 불멸의 곡과 라이프치히 중앙역

2006년 라이프치히 기차역에서 한참이나 머문 적 있다. 물론 당연히 그 많은 기차들을 보면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다. 선로 위의 기차들이 대륙의 변주곡처럼 움직이던 그 풍경을.

대프리카, 대구에 갈 일이 있어 서울역으로 나갔다. 더위 탓일까? 발차 시간을 잘못 알고 나가는 바람에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늘 보고 또 보았던 서울역이지만, 산보 나온 사람처럼 이러저리 걸어다녔다. 역무에 필요한 공간들, 그러니까 표를 사거나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 있는 간이의자들 빼고는, 죄다 상업 공간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이 역은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부대시설처럼 전락하였으므로 몇 걸음만 옮기면 쇼핑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딱 한 군데, 절묘한 공간이 있으니, 푸드 코트다. 나는 푸드 코트를 사랑한다. 일단 없는 메뉴가 없으며, 다 먹었으면 나가라고 눈치주는 법도 없다.

특히 서울역의 푸드 코트는 차창에 붙어 있는 의자에서 창밖의 도심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다. 그 한구석에 앉아서 창밖의 거대한 건물들과 그 아래를 분주히 오가는 왜소한 사람들을 보다가 잠시 페이스북을 보는데, 내 아는 사람이 저 멀리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라이프치히에 무려 한 달이나 머물게 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라, 이, 프, 치, 히. 이렇게 끊어 읽으면서 두서 없이 여러 생각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2006년 라이프치히 중앙역의 모습 / 정윤수

백화점 부대시설처럼 전락한 서울역
우선, 어느 도시에 한 달씩이나 머물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그 사람은 아껴서 돈을 모으고 애써서 시간을 벌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란다. 1년에 딱 한 달을 라이프치히를 시작으로 바르셀로나, 뉴욕, 상하이, 리우데자네이루, 탕헤르 같은 데서 살겠다는 것이다. 꼭 그런 사람이 있었다. ‘국산사자음미실’에 걸쳐 무려 134종 145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남긴 남경태 형이다. 방금 ‘남긴’이라고 했는데, 그는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밤에 평생 할 일을 고작 53년 만에 다 마치고 서둘러 다른 우주로 건너갔다. 그가 그랬다. 한 해는 런던에서 머물고 또 한 해는 파리에서 머물렀다. 한 달 정도면 사나흘보다는 많고 1~2년보다는 적기 때문에 딱 맞춤하다고 했다. 속 깊은 여행자로서 한 달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조급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그런 나날이라고 형은 그랬다.

오래전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에는 어디를 갈 거냐고 물었더니, 마치 곧장 떠날 것처럼 라이프치히라고 즉답했던 일이 생각난다. 왜? 재차 물으니 바흐 음악을 들으러 가고 싶다고 했다. 바흐의 기타 소품을 격조 있게 치던 형이었다. 바흐가 30년 가까이 봉직한 성토마스교회에 가서 음악을 듣는다기보다는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그 경건한 음의 기도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고도 했다. 다른 일로 그 도시를 들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경태 형은 안타깝게도 라이프치히에서 한 달 동안 머무는 계획을 영영 유보하고 말았다. 지금 그 도시에 가 있는 사람도 남경태 형을 잘 알고 있고, 또 바흐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남경태 형 대신에 성토마스교회에 매일같이 참례하리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발권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2006년에 그 도시에 들른 적 있다. 이틀 하고 한나절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달리는 말 위에서 스크랩하는 수준이었지만 바흐의 숨결이 묻어 있는 성토마스교회와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밥 먹고 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보고 또 보았다. 실제로 그랬다. 언제 또 밤의 라이프치히를 볼 것인가 하면서 거칠고 음산한 골목까지 가보았고, 언제 또 새벽의 라이프치히를 볼 것인가 하면서 서너 시간 침대에 누웠다가 곧 일어나 여명의 도로를 걷기도 했다.

라이프치히는 바흐 덕분에 음악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독일 중부 지역의 살림을 책임진 공업도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책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 뒤엉켜 있다. 이를테면 2차 세계대전 전까지 무려 400개 이상의 출판 및 인쇄회사들이 모여 있던 곳이 라이프치히다. 17세기에 세계 최초의 신문(비록 월간이었지만)이 발간된 곳이며, 1632년부터 도서 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무엇보다 독일어본 성경 번역이라는 문화혁명을 통해 종교개혁은 물론 인쇄출판의 혁명까지 주도했던 마르틴 루터의 활동 거점이 작센이었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라이프치히는 자연스럽게 학문과 사상과 출판의 중심지가 됐다.

독일 자유정신의 요람인 라이프치히대학 출신 또는 교수였던 피히테, 노발리스, 니체, 가다머, 그리고 오늘날 유럽을 이끌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같은 인사들의 정신적 거점이 라이프치히의 책 문화였다. 위대한 음악가 바흐의 불멸의 곡들이 유럽 음악의 표준으로 확산된 것도 출판 도시 라이프치히의 산물이다. 1845년,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초판(1845)이 발간된 곳이자 라살레, 베벨, 리프크네히트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활동했던 거점으로 숱한 책자, 선전물, 유인물, 삐라 등이 흩뿌려졌던 도시이기도 하다.

음악의 도시·공업도시·책의 도시
바흐에 대해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나는 꼭 그가 27년을 살았던 라이프치히를 자세히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살았다면 반드시 그 도시는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의 도시, 계몽주의의 도시, 출판사상의 도시. 바로 그 라이프치히에서 바흐는 1723년에서 1750년까지,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살았다. 현재 인구는 50만 정도인데, 바흐 당시에는 3만 정도였고 도심 규모도 무척 작았다. 이 ‘작은’ 도시에서 27년이나 살면서 그가 당대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출판 문화 현장을 모르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많은 음악들과 그 착상의 메모들은 새로운 인간적 규칙을 정립해나가던 계몽주의의 음악적 실천이었다.

그는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로 부임하던 첫해에 대작 <요한 수난곡>을 시작으로 <마태수난곡>, <마니피카트>, <미사 b단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을 작곡했으며, 바로 그 성토마스교회에서 매일같이 칸타타를 봉헌했다. 그러니까 지금 라이프치히에 가 있는 그 사람이 성토마스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마음의 시계는 순식간에 300여년 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대여섯 번이나 그 교회를 들어가곤 했다.

아차, 기차 시간 때문에 빼먹을 뻔한 얘기가 있다. 이게 실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였는데, 더위 때문일까, 잊을 뻔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 얘기다. 서울역에 오면, 조건반사적으로 라이프치히 중앙역이 생각난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건물 연면적이 무려 2만5290평에 달한다. 옛 서울역 건물의 12배가 넘는다. 건물 전면부 길이가 293m에 달한다. 세계 최대 규모다. 인구 50만명의 라이프치히 중앙역의 플랫폼 숫자는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서울역의 19개(기차역 15개, 지하철 2개, 인천공항철도 2개)보다 5개나 더 많다. 그 까닭은, 라이프치히가 유럽의 ‘중앙역’이기 때문이다.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중요한 것은 이 역이 유서 깊은 역다운 면모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역을 비롯해 국내의 수많은 기차역들이 거대한 쇼핑몰의 부대시설처럼 보인다. 발권하고 돌아서면 쇼핑몰로 이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아예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은 일단 쇼핑몰로 들어가서 기차를 타러 움직이는 구조다. 라이프치히 역에도 쇼핑몰이 있다. 그러나 지하 2개층으로 배치돼 있다. 지상의 공간은 전적으로 기차역이다. 간이음식이나 커피는 마실 수 있지만 그래도 쇼핑몰은 지하로 내려가도록 돼 있다. 그 지상의 기차역에서 한참이나 머문 적 있다. 선로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모스크바에서 오는 기차,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를 한참이나 본 적이 있다. 물론 당연히 그 많은 기차들을 보면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었다. 선로 위의 기차들이 대륙의 변주곡처럼 움직이던 그 풍경을, 이 지긋지긋한 쇼핑몰 속 서울역에서 잠시 생각한다. 남경태 형은, 그리고 지금 라이프치히에 있는 사람은 이 얇은 공간을 떠나 깊은 곳으로 잠시나마 사라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