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종북? 그건 낙인일 뿐이야 -버드맨

영화 <버드맨>을 보다가 ‘저건 우리의 이야기네’라고 무릎을 탁 친 장면이 있었습니다. ‘퍼킹 김치’ 대사가 아닙니다. 주인공 리건 톰슨이 뉴욕타임스 비평가 타비타에게 항변하는 대목이었습니다. 타비타에게 리건은 슈퍼히어로 놀이나 하던 ‘딴따라’에 불과합니다. 수준 높은 예술가나 서야 하는 연극무대에 저런 딴따라가 발을 들여놓다니…. 리건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그는 프리뷰 공연을 보지도 않습니다. 타비타는 리건에게 그 누구도 읽어본 적이 없는 최악의 리뷰를 써서 연극을 문 닫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리건은 타비타가 끄적거리고 있던 수첩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수첩을 보면서) 재미없다고? 그건 그냥 ‘낙인’일 뿐이야. 비주류? 그것도 ‘낙인’이야. 모두가 ‘낙인’들이야. 당신은 단지 모든 것에 ‘낙인’을 찍을 뿐이야. 당신은 게을러 빠졌어. 이게 뭔지 알기나 해. 모르지. 왜 모르는지 알아? ‘낙인’을 찍지 않으면 이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야.” “여기에는 기술적인 얘기가 전혀 없어. 구조에 관한 것도, 의도에 관한 것도. 쓰레기 같은 의견들 뿐이야. (…) 악의적이고, 비겁하고, 형편없는 이 따위 리뷰로는 당신 똥구멍이나 닦아.”

이 대목이 특별히 인상에 남은 것은 아마도 제가 기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사를 쓰면서 ‘낙인’을 찍을 때가 많습니다. 타비타 역시 리건에 대해 이미 낙인을 찍어놓고 있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딴따라라는. 그 틀에서만 리건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낙인을 찍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손쉬운 방법입니다.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낙인만으로 규정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인은 흔히 배제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미국의 매카시즘이 그랬고, 오늘날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는 ‘종북’도 그렇습니다. ‘종북’이라는 말 자체가 낙인입니다. 마녀사냥을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세상에 마녀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 안 되는 마녀사냥이 지금 한국에선 종북사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북으로 낙인 찍히는 순간 그 사람이나 단체는 사회의 ‘마녀’로 몰립니다. 아무리 ‘나는 마녀(종북)가 아니야’라고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그 사람이나 단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맥락이나 의미, 의도, 진실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낙인은 이 모든 것을 잡아먹어 버립니다.

낙인 뒤에는 사냥과 증오와 분풀이와 폭력과 파시즘이 뒤따릅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도 용납되고, 때로는 부추겨지기도 합니다.

최근 리퍼트 주한 미대사를 공격했던 김기종에게 여권과 수사당국은 종북 딱지를 붙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기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영화 속 리건의 말처럼 낙인을 찍어야만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 됐든 낙인을 찍는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흔히 낙인을 찍습니다. “저 사람은 ‘또라이’야” “그 신문사는 ‘진보지’야”….

낙인을 찍는 건 쉽지만 그 낙인만큼 우리 사회는 상상력의 결핍, 게으름, 무지, 비이성적 쏠림, 이분법적 사고, 차이에 대한 감수성의 소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낙인을 습관적으로 찍으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후퇴했는지는 지난 몇 년의 세월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찾는다면서 열심히 낙인만 찍고 있으면 그것만큼 이율배반적인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리건의 분장실 거울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존재는 말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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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을 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를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시절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미래 세대 보기가 너무 창피해서.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