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테러 이후

테러는 잘못됐습니다. 여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김기종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예를 들면 나라를 빼앗은 원흉이라거나-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권국가이고 설령 미국의 대외정책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좀 더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주장을 펼치고,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습니다. 테러는 아닙니다.

김씨가 설령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변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테러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개인의 우발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미국도 사태가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미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김기종이 “한·미 군사훈련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쳐 북한 연루설도 제기되고 있지만 저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 이후 이번 테러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김기종의 그동안 행적이나 독도지킴이 대표를 맡고 있는 성향을 감안하면 직접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셔먼 차관은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쉽다”고 말했습니다. 셔먼의 발언은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릴 만한 요소가 충분했습니다. 미국에는 일본이 과거의 적일지 모르지만 한국과 중국은 다릅니다. 식민지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아직도 그 고통의 역사를 깨끗이 지우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과거는 박물관에 있는 유물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입니다. 셔먼은 미국의 국가 이익에는 민감했을지 모르지만 과거사를 바라보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감정에는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한·미·일 삼각동맹을 굳건히 하고 싶다면 왜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가 계속되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부터 들여다봐야 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일본에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성실하게, 진지하게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틈만 나면 역사적 도발을 감행합니다. 역사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서술하고, 위안부 내용은 삭제합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피해국에는 얼마나 큰 상처와 분노를 일으키는지 미국은 알아야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직 때 독도를 방문했던 것은 그 방문이 적절했는지의 논란과는 별개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감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사를 보면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려 전쟁까지 이른 사례를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셔먼 차관의 발언대로 과거사를 무시하거나 덮어버리고 한·일이 진정으로 손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설령 억지로 손을 잡는다고 해도 그런 불신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한·미·일 삼각동맹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미국이 한·일 간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번 리퍼트 대사 테러사건처럼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와 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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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대사는 한국에 부임한 이후 한국 친화적인 행보를 해 한국민들의 환영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테러 이후 반응만 보더라도 리퍼트 대사에 대한 한국민들의 친밀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리퍼트 대사가 한국을 사랑해서 그런 행보를 한 것은 아닙니다. 주한 미국대사로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런 행보를 했을 것입니다. 한국민들의 감정과 문화, 성격을 잘 이해하는 리퍼트 대사의 현명함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그러나 한·일 간의 과거사에 대해서도 미국이 리퍼트 대사처럼 민감하고 세심하고 현명했는지는 잘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김기종의 테러는 우발적이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은 우발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