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작가 안토니오 알타리바 “악의 세계화는 어디서나 나타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쓴 스페인 작가 안토니오 알타리바 인터뷰

한 노인이 창문을 뛰어넘는 장면. 올해 영화로도 개봉돼 인기를 끈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묘하게 닮았다. 2009년 현지에서, 그리고 2013년 한국에서 출간된 시기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작품 속 창문을 넘어 뛰어내린 노인이 걸었던 운명은 사뭇 다르다. 부패한 왕정과 교회, 자본가에 맞서 사회혁명에 나섰던 아나키스트는 스페인 프랑코 독재정권 하에서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다. 한국을 방문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원제 El Arte de Volar)의 작가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아버지의 일생을 다룬 작품의 내용처럼 사회적 약자들이 추락 직전의 벼랑 끝으로 몰리는 ‘악의 세계화’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어서 창문 밖으로의 투신이 더 이상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 될 수 있게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도 덧붙였다.

한국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제주의 강정마을을 방문했다.
“스페인의 사라고사 태생이다. 오래 전부터 미군기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지역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지역이다. 이념에 대해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금발인 미군들이 젊은 스페인 여성들을 쉽게 유혹하는 모습이 싫었을 뿐이었다.(웃음) 스페인에선 1966년 미군 폭격기 폭발로 기체에 실려 있던 수소폭탄 2기가 팔로마레스라는 어촌마을에 떨어져 일대가 방사능에 오염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이 소련과 미국 간 냉전의 인질이었던 것처럼 지금 제주도민들도 동일한 갈등의 인질이 되고 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작가인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부천국제만화축제 대담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 제공

프랑코 독재정권에서 시달린 아버지 세대의 문제는 민주화 이후 해결됐다고 보나.
“독재정권 시기 500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왔지만 후손들은 죽은 조상의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던 과거가 있다. 제주에서도 근래에 와서야 규명된 비슷한 일(4·3사건)이 있었다고 들었다. 물론 이후 민주화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민주화’란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달아주는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하기도 하다. 고작해야 시위를 해도 봐주겠다거나 1인1표 선거를 시행한다는 정도까지만 보장할 뿐이다. 그 뒤에는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독재가 있다. 옛날처럼 직접 붙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죽이진 않아도 이 경제시스템 하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는 이들은 오히려 늘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 세대가 젊은 시절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린 뒤 노년에는 경제적 위기까지 겪는 모습도 한국의 사회상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악의 세계화는 어디에서나 문화나 언어, 시간까지도 초월해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경제성장률 뒤에 실업률을 감추고, 자살률 같은 죽음의 수치들은 아예 정부에서 애써 감추며 외면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상황에 처하면 그냥 포기하고 죽으려고 마음먹게 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까지 퍼지고 있다. 사회시스템의 잘못으로 희생당하는 것을 해결하기는커녕 정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문제라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모양새다. 스페인의 경제위기만큼이나 ‘악’이 쉽게 세계화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도 그런 논리가 곧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일 정도로 노인들이 겪는 사회적 단절 문제도 크다.
“한국에 와서 보고 느낀 바로는 기술의 발달로 나이가 많은 층에서 느끼는 문화적인 거리감만 해도 상당히 커 보였다. 유럽보다도 도시화나 기술발달 속도는 빠른데, 이런 추세를 따라가야 하는 입장에 처한 이들을 향한 배려는 적어 보인다. 한국과는 달리 유럽에서 보다 느리게 가자는 여론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속도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적인 공동체 안에서도 노인과 젊은 세대 간의 소통이 오히려 유럽보다 부족하다는 점 역시 급속한 삶의 속도 때문에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모자라서 그런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전공인 불문학에 얽매이지 않고 만화로도 영역을 넓혀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데엔 이유가 있나.
“직접 그림을 그리진 않지만 처음 사전작업에 들어갈 때부터 최종작업 결과물까지 어떤 그림 스타일로 표현할지를 늘 고려한다. 그림 속의 여백을 채울 부분을 선택하는 문제는 어렵지만 그만큼 예술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시선의 흐름과 빛의 분위기 같은 요소는 서사를 하는 작업에도 분명히 도움을 준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서는 아버지의 인생이라는 개인적인 출발점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죽음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시대적 한계와 그것에 부딪치며 넘어서려 했던 모습들을 사회적 틀에서 다루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역경을 겪는 장면마다 비상했다가 추락하는 모습이 여러 번 극적인 그림으로 표현된다.
“예술이라는 차원에서 단순히 고생하는 모습만 그려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싶었다. 아버지 자신이 생각했을 자신의 삶의 의미와 마지막 죽음이라는 선택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젊었을 적 여러 번의 날갯짓이 가장 마지막 단 한 번의 절정을 위한 연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엔 마지막 창문에서 떨어지는 시도에서 어쩌면 성공한 건 아닐까. 제주에 갔을 때 날고 있는 걸 봤는데.(웃음)”

결론만으로만 보면 아버지 세대는 결국 비행하지 못하고 추락했고, 원하던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다음 세대들이 추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땅에서 발을 뗐다가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스스로 날아보고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주변에서 날아보려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고 도와야 한다는 것도. 언제나 체제와 권력은 날지 못하게 묶으려 하고 그것에 저항하면 테러나 반역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해왔다. 아버지 세대 역시 시도했고 또 실패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날았던 순간이 있었다. 오래 날기 위한 연습은 그렇게 날아본 경험을 서로 공유하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떠 있도록 유지하는 데 비결이 있지 않을까.”

<글·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통역·윤보경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