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의 문화의 발견]책 사재기는 ‘승부조작’이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가면 책은 팔린다. 좋은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모처럼 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나는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모임에 나온 인간들도 죄다 남자들뿐이었다. 우리는 종로에서 만나 간단히 반주 겸 저녁을 먹고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그날은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신간을 출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거리로 나오니 문득 영풍문고 간판이 눈에 띈다. 아마도 술김이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동창들을 우르르 몰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친구야, 2차는 내가 살게. 대신 니들은 우리 책 하나씩 사라.” 늘 생활에 쫓겨 책과는 담을 쌓고 있을 게 분명하니 오랜만에 한 권 사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야, 너 지금 사재기하는 거야?”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냐고 물으니 <기분 좋은 날>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더란다. 그렇잖아도 지난주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일하는 김 대리로부터 “요즘 드라마에서는 도서 사재기 장면이 노골적으로 나오더라고요”라는 말을 들은 터였다. 김 대리야 업계 관계자니까 눈여겨봤겠지 하고 무심코 넘겼었는데 동창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으니 궁금해졌다. 대관절 어떤 장면이 나왔길래.

드라마 소재로까지 등장한 사재기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를 틀었다. 새삼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VOD 서비스라는 것은 이런 때 정말 유용하다. 여러 회차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내가 궁금한 대목이 첫 회와 2회(4월 26일, 27일에 방영)에 걸쳐 등장했다. 이런 내용이다. 극중 이름까지는 체크하지 못했지만 김미숙씨가 세 딸을 키우는 엄마로 나오고, 직업은 작가다. 지금까지는 자서전 대필이라든가 리라이팅이라든가 출판사에서 시키는 글 쓰는 일을 도맡아 해왔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에세이를 펴낸다. ‘딸아, 엄마처럼 살아라’라는 제목이다.

책은 나오자마자 (아마도 교보문고인 듯한) 서점에서 종합순위 10위에 들 만큼 잘 팔렸다. 엄마의 기쁨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딸들도 “이제 엄마 고생 끝났다”며 축하해 준다. 헌데 뭔가 이상하다.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는데 작가에게 돌아오는 인세가 한푼도 없다. 게다가 출판사 사장으로 나오는 자가 딸에게 묘한 제안을 한다. “친구들의 아이디(주소)를 알려주면 책을 한 권씩 공짜로 보내줄게.” 잘 팔리는데 왜 그래야 하냐고 딸이 추궁하자 사장은 그제야 사재기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작가인 엄마까지 알게 되고 급기야 출판사에서 되사들여 쟁여놓은 책 더미를 목도한다. 이때 사장이 갓 잡은 생선처럼 살아 있는 대사를 날린다. “초판 1500부 찍어서 39권 팔았어. 나머지는 나랑 서점 담당자랑 ‘짜웅’해서 전부 되사들인 거라고. 집 날아가고 출판사도 날아갈 판인데, 한방에 만회해야지.”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장면을 보는 내 기분이 그랬다.

지난해 5월 열린 출판계 사재기 근절 촉구 기자회견 | 홍도은 기자

실로 ‘사재기 교과서’에 나올 법한 수법이 SBS 주말 드라마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방영되는 동안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슷한 상황이 리얼(5월 6일 방영)로 보도되었다. 발단은, 재작년에 출간된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라는 책의 저자인 스님 정목이 인세를 받지 못했다며 출판사를 고소한 일이었다고 한다.

정목 스님 측 관계자가 “(판매량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고, 내역서라고 자기 맘대로 작성한 것만 보여줬어요”라는 증언이 나온 가운데 “출판사가 밝힌 이 책의 총 판매 부수는 25만부”, 허나 경찰 조사 결과 “인쇄소에서 찍은 책은 12만부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출판사가 자사 책을 되사들였다가 서점으로 출고하고, 그 책을 다시 되사들이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출판사가 되사들인 책은 “저자가 있는 사찰로 보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과연 정목 스님이 사재기한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사재기를 했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해당 서적을 만든 출판사는 과태료 몇백만원은 물겠지만 이미 만만찮은 수익을 얻었을 게 분명한 데다, 사재기로 판명된 정목 스님의 책은 출판사를 바꿔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거다.

사재기는 막을 방법이 없다
지난 5월 19일자 <한겨레>에는 “출판사 신간을 서점에 공급하는 출판도매업체가 거래처 중 하나인 한 대형 출판사의 책을 자사 직원들에게 사라고 강요했다가 이를 거절한 직원을 해고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번에는 출판사가 아니라 도매상이 책을 사재기했다는 내용이다. 책을 되사들이라 지시했다는 이의 목소리를 담은 파일까지 있다고 한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정황으로 봐서 도매상을 통한 사재기 지시는 출판사인 김영사 쪽에서 했을 공산이 크다. ‘김영사쯤 되는 대형 출판사가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도서 사재기(자사 책 되사들이기)는 최종적으로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 진입을 목표로 한다. 일단 순위에 올라가면 책은, 팔린다. 높이 올라갈수록 잘 팔린다. 위에서 거론한 드라마의 출판사 사장도 얘기했듯, 좋은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책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순위에 오른 책을 좋은 책이라 여기고 구매한다. 그러나 이것을 ‘독자가 자신의 취향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라는 단순한 차원으로 환기해서는 곤란하다. 이건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보기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지켜봐 왔다. 사재기를 직접 진행한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도 들어봤다. 그 과정에서 도서 사재기는 앞으로도 여봐란 듯이 진행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가 없어질 리 만무하고, 순위에 올리기 위한 방법 가운데 사재기는 비교적 안정적인 가성비를 보인 데다, 그러한 유혹에 대항할 만한 마케팅적 선택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극단적인 제재, 이를테면 적발 시 출판사를 접어야 한다는 정도가 속도를 늦출 수 있을 텐데 ‘뭘 또 그렇게까지’ 하는 사회적 분위기상 채택되긴 어렵겠다.

김홍민의 문화의 발견

그래서 말인데, 몰랐으면 모르되 출판사가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독자들이 화를 좀 내주면 좋겠다. 띠지가 구겨진 책을 받았을 때 인터넷 서점에 별을 한 개 매겼던 것처럼, 책값을 더 받으려고 멀쩡한 책을 분권한 거 아니냐고 의심했던 것처럼, 출판사의 과대광고에 속아서 책을 샀다고 판단했을 때 분개했던 것처럼. 이건 뉴스로 치면 ‘편파 보도’고 스포츠로 치면 ‘승부 조작’ 같은 거니까 얼마든지 마음껏 화를 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북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