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지루한 빗속 비극의 풍경

스테디 레인. ‘길고 지루하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제목의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제목이 뜻하는 바 그대로 이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들이 지루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이루어진다.

시카고 드라마티스트 소속 극작가로 활동해온 작가 키스 허프는 자신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 이야기를 썼고, 덕분에 <스테디 레인>은 두 시간 내내 어둡고 음습한 시카고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듯 도시의 인상을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여기에는 극중 두 인물의 대사를 통해 암시되는, 끝없이 쏟아지는 비의 이미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는 시카고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폭력 이미지를 더욱 어둡고 차가운 느낌으로 전달해주고, 출구 없는 지옥에 빠진 듯한 이들의 삶이 내리는 비처럼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연극 <스테디 레인>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제공

또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몰랐던’ 두 주인공, 대니와 조이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제목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카고의 말단 경찰관 대니와 조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오랜 파트너이자 친구이다.

거칠고 다혈질이면서도 자기 가족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대니는 가족도, 연인도 없이 술에 기대어 사는 친구 조이로 하여금 매일 밤 자신의 집에 와서 밥을 먹게 하고, 어느 날 자신이 관리하는 뒷골목 창녀 한 명을 소개시켜준다. 그리고 모든 일은 바로 그날 밤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견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그 와중에 순찰 중 만난 약에 취한 베트남 소년을 연쇄살인범의 손에 다시 넘겨주는 일이 벌어지면서 대니와 조이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직장과 사회,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두 사람은 출구 없는 진흙탕 속을 뒹굴며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 각기 다른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마주하게 된 최악의 상황이 어느 순간 ‘뻥’하고 갑작스레 터진 것이 아니라 극의 초반부터 아주 천천히, 조금씩 커지면서 결국 이들을 완전히 덮치게 된다는 점이다.

연극 <스테디 레인>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제공

별 것 아닌 것 같던 보슬비가 사람을 흠뻑 젖게 만들 듯, 극의 초반부 아무렇지도 않게(때로는 장난스럽게) 이들이 내뱉은 이야기들이 어떻게 이들을 옭아매고 비극적인 결말로 이끄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이 작품을 읽는 흥미로운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마치 느와르 영화를 보는 듯 현란한 총격전과 숨가쁜 추적, 크고 작은 사건들이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이 작품은 놀랍게도 오로지 두 배우의 대화와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극도로 간소화된 무대 위에서 두 배우는 엄청난 양의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면서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야기를 도와주는 영상이나 조명, 소품, 음향 효과도 전혀 없다. 그야말로 두 배우의 에너지와 스토리텔링만으로 모든 것을 커버하겠다는 의지다. 처음에는 그냥 ‘말’로만 들렸던 대사들이 배우의 몸을 빌려 어느 순간 하나의 장면과 풍경을,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흥미롭다.

문화내시경

이석준-이명행, 문종원-지현준 콤비로 이루어진 젊은 배우들의 팽팽한 에너지 역시 이야기에 생생한 질감을 더한다. 1월 29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