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스타마케팅의 완성을 기대하며

금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서양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진지하지 못하거나 머리가 나쁠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마치 눈이 크면 순진할 것이라 생각하거나, 긴 생머리는 청순함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금발 미녀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외모로만 평가받는 편견의 피해자도 되기 쉽다.

뮤지컬 <리걸리 블론드>

‘리걸리 블론드’는 바로 이런 서양인들의 선입견을 통쾌하게 뒤집어 보는 재미가 담긴 코미디다. 우리말 제목으로는 ‘금발이 너무해’라는 이름으로 번안돼 영화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한 것은 사실 멋대로 고쳐진 우리말 제목이라는 말도 있다. 영어 제목 어느 곳에도 너무하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원래의 영어 제목에는 숨겨진 의미가 따로 있다. 영어권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적 표현인 ‘legally blind 즉, 법이 보장하는 장님’이라는, 눈이 아주 나쁜 사람을 지칭하는 재미난 표현을 교묘하게 비틀어 장님(blind) 대신 금발(blonde)로 대체시킨 경우이다. 물론 이 제목은 이야기 후반부에 금발 주인공이 법정에서 활약을 펼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실도 한다. 굳이 의역하자면 법정의 금발쯤 되는 셈이다.

내용은 금발에 대한 선입견을 정반대로 풀어낸 통쾌함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세인의 편견을 모두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하버드 법대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거나 섹시한 동작에 반응하는 남자들의 속물근성을 우스꽝스레 활용하는 등 작품 속 이야기에는 여전히 풍자와 해학을 통해 금발 미녀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흐뭇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결말은 그래서 미녀가 진실한 사랑도 얻고 인생도 성공하게 된다는 핑크빛 아메리칸 드림으로 완성된다. 리즈 위더스푼이 등장했던 영화가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받으며 인기를 누렸는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뮤지컬 <리걸리 블론드>

뮤지컬은 물론 영화의 후광을 입고 시작됐다. 성공적인 무비컬들이 으레 그래왔듯이 작품 역시 무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원작과 차별되는 화려한 덧입히기를 시도했다. 여러 겹의 이동식 세트와 유머러스한 전개가 무대를 위해 추가됐고, 노래와 춤이 곁들여져 지극히 대중적인 문화상품으로 다시 포장됐다. 주인공을 MTV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하는 등 대중의 호기심을 모으기 위한 여러 시도들도 뒤따랐다. 결국 브로드웨이에서의 흥행은 대서양 건너 런던으로도 이어졌고, 국내에서도 몇해째 앙코르 무대가 꾸며지는 등 제작사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우리 무대의 또 다른 특징은 스타 마케팅의 적절한 접목이다. 주인공인 금발 미녀로 소녀시대의 제시카와 ‘응답하라 1997’의 히로인이었던 에이핑크의 정은지가 뮤지컬 배우 최우리와 번갈아가며 무대에 등장한다. 금발 미녀의 상대역인 에밋 역으로는 가수 팀도 더블 캐스트로 등장한다.

문화내시경

티켓이 팔려나가는 매출로만 보자면 아이돌 스타들이 단연 월등하지만 무대의 재미나 완성도는 반드시 ‘돈벌이’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늘 투덜대며 불평 많은 평론가 입장에서는 그래서 관객들의 속 모를 마음이 아쉽고 심지어 야속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뮤지컬이 대중문화산업의 하나라는 점을 십분 감안한다면 사람들의 취향을 정확히 읽어내 가려운 곳은 콕 집어 긁어줄 수 있는 프로듀서의 안목과 기획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생각에 겸손해진다. 그래도 언젠가 단지 스타라는 이유가 아니라 정말 그 무대에 잘 어울리고 훌륭해서 더 환호를 보낼 수 있는 진정한 뮤지컬 배우의 등장이 뒤따르길 기대해본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