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엽의 눈]무상급식은 생활정치다

적이든 동지든 상대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괜찮은 분’이라고 평가한다. 워낙 적대적 대결의 구도가 뚜렷한 한국 정치판의 줄서기 구조에서 괜찮은 정치인이 드문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괜찮은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훤칠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은 그를 서울시장으로까지 비상하게 하는 날개가 되었다.

6월 중순, 약 80만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구용 서명지 박스 앞에 선 오 시장의 모습은 비장했다. 짧게 깎은 머리와 웃음기 없는 표정에다 참모들에게 투표에서 지면 각자도생하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마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장수를 연상시켰다. 이제 무상급식에 대한 성찰적 논의는 사라지고 주민투표가 오 시장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에 관심 있는 정치공학의 주판알 튀기기를 시작한 관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정치 쇼의 흥행을 위해, 그리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이념의 유령은 어김없이 불러들여졌다.

뭔가 뒤틀린 이 정치의 시대에 우리는 복지논쟁이나 개인의 정치적 사활문제를 훨씬 넘어선 곳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는 시민의 관심과 시민의 욕구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시민사회의 뚜렷한 경향은 ‘생활정치운동’의 주류화라고 할 수 있다. ‘생활정치’의 개념은 기든스(A Giddens)의 1990년대 초 저술인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에서 ‘해방의 정치’의 대응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해방의 정치를 민족해방·계급해방·정치민주화 등이 주도하는 근대적 삶의 ‘기회’와 ‘조건’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생활정치는 삶의 ‘양식’과 삶의 ‘내용’에 관련된 정치를 말한다. 즉 근대성의 핵심 제도에 의해 억압되었던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과정이다. 환경·여성·평등·평화·인권 등의 가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선택’으로서의 생활정치 이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상급식이 단순한 복지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는 것은 바로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선택의 의미를 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지는 하위계층의 생존을 보장하는 수혜적 장치에 머물지 않고, 시민적 삶의 양식과 관련된 생활정치의 주요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상급식과 복지의 문제는 수혜의 폭이나 예산의 문제를 넘어 생활정치의 맥락에서 새로운 가치를 기반으로 한 우리 삶의 전면적 재구성과 관련된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의 방식을 채택할 것인가에 대한 광범하고도 궁극적 질문을 제기할 시점에 있다. 사회 변동에 대한 통찰력과 진정성,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시민적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질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방향과 전망에 눈을 돌려야 한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시장 조건에서 생활정치는 ‘생존’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힘겨운 싸움은 생계수단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절박한 위기의 공감구조를 확산시켜 시민들을 ‘희망버스’로 모여들게 하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일자리를 찾는 데 지쳐 있고, 남아 있는 이들은 일과 경쟁에 지쳐 쓰러지는 가혹한 정글의 현실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조대엽의 눈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도모하는 길인지에 대한 전사회적이고 근원적인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무상급식이라는 생활정치의 문제를 역사퇴행적 이념의 정치로 판을 가르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전쟁도 겪었고 쿠데타도 있었는데 한 시대를 넘어서는 고통으로 선거비용 약 200억원은 오히려 쌀 수 있다고 위안 아닌 위안을 가져보는 가운데 이미 이념의 정치를 선도하는 구시대의 정치인이 된 오세훈 시장의 모습이 겹친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