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엽의 눈]‘시민의 날’ 제정하자

그때 그들은 시민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일구는 시민사회의 ‘일굼이’ 역할을 맡았다.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의 버거운 과제를 몸으로 겪은 후 다시 새로운 운동판에 뛰어든 것은 개인에게는 생애사적 고난을 각오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양은 도시락을 난로에 데워 먹는 모습은 아마 1970년대에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봉급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주저되는 몇 푼의 급료에 의지했던 시민운동의 일굼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1990년대에도 여전한 일상이었다. 시민단체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직업 시민운동가’들은 이렇게 출발했다. 1990년대 이후 시작된 경제정의, 참여, 인권, 환경, 여성, 평화 등 시민운동의 이슈로 자리잡은 변화와 희망의 가치들은 이처럼 고단한 생의 선택에서 피어났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정부·국회·언론·경찰 등 주요 기관에 대한 신뢰가 약 30% 수준을 넘지 못할 때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가 70%를 넘어섬으로써 그야말로 화려한 ‘영향력의 정치’를 보여준 공적은 운동 일굼이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커진 시민정치의 역량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진보적 가치를 지향했던 노무현 정부의 등장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이 역시 활동가들의 공이 지대했다.

2001년에는 전국 211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시민단체들의 협력과 지원을 위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출범했고, 지금은 그 규모가 늘어 456개 회원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지난 6월 9일 바로 이 연대회의의 출범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좋은 자리에서 이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시민운동 위기론과 함께 활동가들이 스스로 느낀 역할 위기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사장을 둘러보며 와닿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활동가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그간의 성공적 활동을 축하해야 할 자리에 그 흔한 정치인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들 왔어”를 연발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지난 20년 동안, 특히 시민운동이 새롭게 분화된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아래에서부터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1980년대까지 산업화가 주도하는 ‘성장의 시대’를 살았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생활정치가 주도하는 ‘성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와 시대정신이 들먹여지기 전에 성찰의 시대는 아래로부터의 조용한 변화를 만들었다. 지역을 바꾸고, 마을을 바꾸며, 공동체를 다시 만드는 일들이 천천히, 그러나 광범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누구인가? 성장의 시대에 정부가 나서서 산업화의 역군을 표창하고 수출기업들을 금탑이니 은탑이니 하며 서훈하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제 기존의 삶의 방식에 대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웠던 시민사회의 일굼이들,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앞에서 이끌던 ‘앞섬이’들, 그리고 이제 시민과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문적 운동지식으로 뒤에서 밀어주는 ‘뒷심이’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이야말로 오늘과 같은 성찰의 시대에 표창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조대엽의 눈

이들의 활동이 귀하게 여겨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들의 일을 존중하게 될 때 우리 사회는 남다른 격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의 날’이라도 제정되어 시민적 삶의 공공성과 이에 헌신하는 실천가들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날 하루쯤은 활동가들의 휴일이 되어도 좋겠다. 목련꽃 흐드러진 4월도 좋고, 핏빛 철쭉이 산과 들을 덮는 5월도 괜찮겠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저항의 아스팔트를 떠올리면 6월도 시민의 날을 만들기에는 나쁘지 않을 듯하다. 밝지 않은 표정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아름답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