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22) 전투기도 찾을수 없는 ‘천혜의 고립’

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알래스카에서 가장 이상한 마을, 위티어’

일단 왼손을 펴서 책상에 얹어보자. 나는 지금 알래스카에서 가장 이상한 마을 위티어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앨런 타일러라는 여행작가가 그렇게 말했다. ‘알래스카에서 가장 이상한 마을’이라는 책도 써놓고, 본인은 알래스카를 떠나 ‘48도 이남’으로 튀었다. 미국 시애틀에 산다. 48도 이남은 북위 48도 아래를 가리키는데, 알래스카 사람들이 본토를 부르는 말이다. 어쨌거나 다시 왼손으로 돌아오자면, 검지와 중지가 만나는 부분, 거기가 위티어다. 두 손가락 사이 오목한 공간이 고요하고 잔잔한 프린스 윌리엄 해협, 검지와 엄지가 만나는 어디쯤이 앵커리지라 할 수 있겠다. 앵커리지에서 위티어로 가려면 검지손가락의 불룩한 관절, 즉 추가흐 산맥을 걸어서 넘거나 배를 타고 검지손가락을 빙빙 돌아서 가야 한다.

위티어 마을 뒤 포티지 빙하 트래킹.

1년 내내 안개·구름 끼는 입지적 환경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요는 위티어의 입지가 예사롭지 않다는 거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에 둘러싸인 데다, 1년 내내 구름과 안개가 낀다. 전투기가 작정하고 폭격하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위티어에서 마음만 먹으면 프린스 윌리엄 해협을 타고 태평양으로 짜잔, 하고 나타날 수 있다. 비밀 병기 양성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알류산 열도를 침공하자 충격을 받은 미국은 위티어를 콕 찍어 해군 양성 기지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빙하 물에서 목욕하고 곰의 쓸개를 핥아먹으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이런 이야기의 끝이 언제나 그렇듯, 제대로 출동 한 번 못 해보고 전쟁이 끝나버렸다. 군인들은 1964년 위티어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기왕 살게 된 것, 하며 남은 사람들이 아직도 3000여명이다. 한때는 3만명이 살았다.

우리의 숙소는 위티어 제 2의 고층건물, 15층짜리 베기츠 타워였다. 직육면체에 성냥개비로 쑤셔 창문이라고 뚫어놓은 것 같은 건물이었다. 실용성이 유일한 미덕으로, 우리나라 과천 정부종합청사와 비슷하다. 과천 청사는 ‘한국 건축 100년사’ 책에도 나오는데, 두 번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로 나온다. 실용성만 따지자면야 베기츠 타워를 따라갈 수 없겠다. 위티어 주민의 90%가 베기츠 타워에 산다! 우리 숙소는 14층, 주인집은 15층이었다. 대부분의 관공서와 상업 시설도 이 건물 1층에 입주해 있다. 기숙사처럼 좁은 복도를 따라 슈퍼마켓, 술을 파는 리쿼 스토어, 방 한 칸을 나눠 쓰는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과 태닝 스토어, 우체국과 교회가 이어지는 식이다.

오후에는 마을 뒤 포티지 빙하로 트래킹을 갔다. 뒷산을 올라가 빙하의 입구까지 가는 루트였다. 맞바람에 날려 온 모래를 씹으며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산자락 자갈길을 올라갈 땐 그저 울고 싶었다. 뒷산 약수터도 안 가는 내가 아닌가. 북극곰(여행 동행자)은 내가 돌아가자고 할까봐 이미 성큼성큼 내빼고 없었다. 빨갛게 언 뺨을 문지르며 두 번 다시 등산화 챙겨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라고 결심할 즈음 빙하가 나타났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에 나오는 풍경이 내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앞으로 그냥 사람이 아니기로 했다.

위티어는 오랫동안 ‘고립’의 대명사였다. 기차는 자주 다니지 않았고, 배는 더욱 뜸했으며, 비행기를 운항하고 싶어도 활주로를 닦을 만한 평지가 없었다. 산 때문에 전파도 가로막혀 1980년대에야 비로소 텔레비전이 나왔다. 아파도 방법이 없었다. 꾹 참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의사를 기다리거나 헬리콥터를 불러야 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철로 위로 자동차를 몰았다가, 결국 헬리콥터 부르는 비용보다 더 비싼 견인비를 내야 했다. 주민들이 가슴을 치며 ‘위티어의 포로들 Prisoners of Whittier’ 티셔츠까지 만들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지난 2000년 자동차 터널이 뚫렸다. 그나마도 편도 터널이어서 정해진 시간에만 열린다.

터널이 닫히자 우리는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지 않는 것은 여행자의 예의가 아니다”라며 콜라잔을 들고 완벽한 고립을 축하했다. 모든 것을 다 파는 잡화점에 들러 앨런 타일러의 위티어 책도 사 왔다. 다운타운에서 숙소까지는 지하 터널과 엘리베이터로 돌아왔다. 역시 벙커 같은 마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우리를 흘끔 쳐다보다 자기들끼리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 추운 동네에서 손마다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있었다.

TV도 1980년대에 들어 시청 가능
주인 아줌마가 아침식사로 가져다 놓은 사과를 베어 물면서 나는 아까 사온 책을 펴들었다. 1964년 3월 27일 규모 9.2의 강진이 위티어를 강타했다. 오일 탱크가 뒤집어지면서 불이 붙었고, 땅은 금간 듯 쩍쩍 갈라졌다. 32m 높이의 파도가 위티어를 덮쳐 베기츠 타워의 10층까지 침수됐다. 당시 70여명이던 주민 가운데 1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기츠 타워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어떻게? 작가는 회의적인 어투로 계속 쓰고 있었다.

“아직도 위티어에는 갖은 루머가 나돈다. 뷰크너 타워가 핵 잠수함을 만들기 위한 기지였다든가, 실제로 사망한 주민은 13명이 아니라 30명이라는 등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 방은 비어 있었던 것일까? 게스트하우스라기엔 누군가가 살던 흔적이 역력했다. 냉장고로 달려갔다. 역시, 커다란 초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아이스크림! 이걸 먹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거야.” 내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든든히 먹고 나섰다. 아침 햇빛 아래 동네는 버려진 산업단지 같았다. 녹슨 자동차에 폐타이어, 이끼가 핀 요트, 박살난 화분이 골목에 뒹굴었다. 북극곰이 분위기를 밝게 해보겠다고 휘파람을 부는데, 하필이면 드라마 ‘트윈픽스’ 주제가였다. 꼭 이런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룬 드라마다. 청년 두 명이 일요일 아침부터 삽으로 땅을 파다 말고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다, 뭐 이런 얼굴이었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언덕 끝 뷰크너 타워는 지하 2층, 지상 6층, 길이가 150m가 넘어 학교나 병원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2차 대전 때 군인 막사로 지어졌던 이 야심만만했던 건물은 주민들이 베기츠 타워로 이주한 뒤 버려졌다. 시멘트만 발라놓은 것 같은 잿빛 건물은 공상과학 만화에 나오는 폐허의 도시 같았다. 흰 옷의 독일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또박또박 걸어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탐조 망원경으로 건물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벽에 스프레이로 휘갈긴 글자가 보였다. “너는 4시20분에 죽는다(You will die @ 4:20)” 우리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봤다. 위티어를 떠나는 배가 출발하려면 아직 6시간이 남았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