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탐색]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

아우슈비츠가 인종주의의 광기가 할퀴고 간 살육의 현장이라면, 체르노빌은 원자력 기술에 대한 인간의 맹신이 빚어낸 참극의 현장이다. 원전에 대한 맹신은 인종에 등급이 있다는 편견만큼 무섭다. 맹신은 재앙을 낳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김은혜 옮김·새잎·1만6000원

“발전소에 불이 났어.” 1986년 4월 26일 오후, 소방대원 바실리 이그나텐코는 아내 류드밀라에게 말했다. “빨리 들어갈게.” 그와 함께 출동한 동료 소방대원들은 평범한 화재라고 생각했다. 류드밀라가 남편의 성한 모습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다.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남편은 날이 갈수록 망가졌다. 아내는 남편 곁을 지켰다. 누군가 말했다. “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죽고 싶어요? 정신 차리세요.” 결국 남편이 죽었을 때 류드밀라는 임신 중이었다. 예정보다 빨리 태어난 딸은 4시간 만에 죽었다. 아이의 간이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 있었다.

체르노빌에 인접한 벨라루스에서 류드밀라 같은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사고 후 벨라루스에서는 485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그 중 70개는 매장됐다. 국토의 23%가 1㎢당 1퀴리(Ci) 이상의 세슘-137로 오염됐다. 책이 출간된 1999년 당시 벨라루스 국민의 20%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에 거주했는데, 그 중 70만명은 어린이였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사고 이후 10년 동안 벨라루스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사연을 기사의 틀에 억지로 집어넣어 재구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피해자들의 육성을 일일이 담았다. 4살짜리 라리사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갓 태어난 딸은 아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루였다. 온몸이 구멍 하나 없이 다 막힌 상태였고, 열린 것이라곤 눈뿐이었다.”

사고 수습을 위해 구소련 전역에서 소집돼 사고 지역으로 파견된 군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몸’으로 때웠다. 그들은 첨단장비 대신 삽을 들었다. “말하자면 핵을 삽으로 푼 거다.” 한 군인은 제대하자마자 2급 장애인이 됐다.

대다수 벨라루스 사람들은 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 옆집 사람들이 그해 근처 숲에서 베어 온 나무로 바닥을 새로 깐 다음 방사선 수치를 검사해보니 허용치의 100배였어요. 그래도 그대로 두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이상해졌다. 사고 발생 10년 뒤 벨라루스 아이들은 조회 시간에 15분만 서 있어도 기절하고 코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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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이후 확연히 다른 세상이 만들어졌다. 체르노빌 이후의 세상에서 죽음은 도처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출몰했다. 러시아의 한 환경단체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로 150만명이 사망했다. 저자는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고 썼다. 후쿠시마는 체르노빌의 미래였을까. 2011년 현재 지구상에는 400기가 넘는 원자로가 가동 중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