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한·일 할머니를 짓누르는 ‘전쟁의 기억’

‘역사의 진실을 바로보고 동북아 평화의 미래를 함께 열자’ 역사체험캠프 참관기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 그리고 100년이 흐른 2010년 8월.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일본인, 재일조선인, 그리고 애초 북한 국적을 가졌으나 지금은 한국 국적을 갖게 된 탈북자. 이런 다양한 청년 50여명이 침략, 식민, 전쟁, 분단의 역사 현장(일본/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전쟁피해자를 만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바로보고 동북아 평화의 미래를 함께 열자’는 뜻을 모아 7박 8일간의 ‘역사캠프’를 떠났다. 한국에서 KYC(한국청년연합)와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에서 NPO법인 세이피스프로젝트(SayPeaceProject)와 KEY(재일코리안청년연합)가 함께 한 행사다.

행사 참가자들이 한국의 나눔의집 역사관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전시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KYC 제공

오키나와에서 살아난 일본할머니의 기억
2010년 8월 3일. 도쿄대학교 정문 근처 조그마한 강의실. 역사캠프 참가자들은 백발에다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가미에다 치요(上江田千代) 할머니(81)를 만났다. 오키나와 전투의 생존자다. 할머니는 당시 계란 크기의 감자 2개와 소금국으로 버티며 ‘일본은 승리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16세 소녀였다. 일제는 미군의 공격이 본격화하면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본군 간호요원으로 전쟁에 참여시켰다.

할머니의 증언이다. “오키나와는 자연동굴이 많습니다. 그곳에서 일본군 책임자 소위 2명과 내가 부상병을 치료했는데 양손 없는 사람들에게 물도 떠먹여 주었습니다. 약도 없고 위생도 엉망이었습니다. 죽는 것을 기다릴 뿐….” 미군의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 일본 군부는 전군(軍)과 주민들에게 “잡히지 말라, 포로가 되지 말라. 포로가 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고 자결명령을 내렸다. 자결할 때 필요한 수류탄과 청산가리를 보급했다. 16세의 소녀는 수류탄을 구급가방 깊숙한 곳에 보관하며 자결할 날에 사용하려고 했다. 죽고 싶어도 어떻게 죽는지 방법을 몰라 수류탄 사용법을 소위에게 물어 연습했다.

지상전이 전개된 3개월 동안 동굴 생활을 하며 밤에만 이동했다. 미군의 조명탄이 터져 밤이 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시체들이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달렸다. 시체 위를 걸으면 물컹거리며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전쟁이었다.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것, 죽음에 두려움이 없는 것. 파란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것. 총탄과 폭격이 없는 세상. 이것이 제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원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멈춘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추악한 기억과 고통은 지금도 할머니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그 무거운 어깨가 언제쯤 가벼워질까? 과연 그렇게 될 수는 있겠는가?

일본인 할머니는 국가가 저지른 추악한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이 할머니의 절절한 증언에 눈물이 났다.

잊지 못할 위안부의 상처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 하나. 8월 6일 나눔의 집을 방문한 후에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순희 할머니를 만났다. 19세의 나이로 원산에서 연행되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언니도 강제 연행돼 위안소에 들어오게 된 기막힌 사연. “원산에서 우리 집이 역 앞에서 여관을 했는데,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도 않았고…. 그런데 어떻게 한 집에서 두 명이나…나 한 명이면 되는데, 왜 두 명이나 이렇게 못할 짓을… 우리 아버지도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이런게 어딨어? 나는 너무 억울해.”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는 아직까지 수요 집회에 한번도 나간 적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우리에게도 ‘사진 찍어서 여기저기 올리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지금 87세가 되신 박순희 할머니는 “나는 내 삶이 너무 창피해.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라고 울부짖으셨다. 그리곤 더 이상 증언하시기를 중단하셨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증언하신 날엔 60여 년 전의 그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악몽에 시달리고, 일본 군인의 칼에 찔렸던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난다고 했던 할머니.

한국, 일본, 재일코리언 청년단체들이 주최한 역사캠프 행사에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생존한 일본의 가미에다 치요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50년이 넘도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온,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 외롭고 힘든 시간이 한·일(韓日) 할머니들의 입을 통해서 역사의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된 전쟁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고통을 전가시킨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전쟁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우리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국적에 관계없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세대들이 할머니(전쟁피해자)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쟁피해자들은 대부분 고령이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대부분 “시간이 없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며 전쟁 없는 세상, 평화로운 동북아시아 미래를 상상한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분명한 평화의 실체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 지금까지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역사의 무거움 앞에, 국가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해진 개인을 느끼며 한숨 쉬었다.

한 한국 학생이 눈물을 쏟으며 자기고백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이렇게 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쏟았는데 내일 당장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내가 두렵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본 학생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울었다. “혼자가 아니잖아. 우리가 같이 하자. 포기하지 말자.”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답은 알지 못해도 아픈 역사,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한 모습이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우미정 KYC(한국청년연합) 활동가>

‘나눔의 집’에서 동아시아평화를 생각하다
신덴 사토시(新田哲史) <도쿄대학교 사상문화학과 철학전공>

인권도 이성도 존재하는 않는 전쟁. 그 전쟁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국적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있겠지만 가해·피해라고 하는 벽을 넘어 한사람의 시민으로서,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세대로서 “과거로부터 역사의 진실을 함께 배우고 입장을 공유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게 되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국의 전쟁피해자를 만났다. 일본에 대한 역사, 전쟁의 책임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나눔의 집’방문,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우리는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그런 책임감을 느꼈다.

한국 측 참가자 중 일부가 “우리가 만나서 함께 배우면서 공감대도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일본이 너무 밉다. 내 안에 숨어있던 반일 감정이 다시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순간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교류하는 동안 일본인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지게 되었다”라고 하는 의견이나,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적극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연결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 역사캠프는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을 향한 첫걸음, 그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관계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아직 불충분하며 아직도 여전히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적 과제가 놓여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지역의 화해나 군축을 실현해가고 동아시아 평화 실현의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역사캠프 참가자들이 여기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역사캠프의 기억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함께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재일조선인, 민족적 정체성을 둘러싼 기억투쟁
김성환 <중앙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지배시기에 일본에 건너오게 된 조선인 및 그 자손을 말한다. 재일조선인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다. 전후에는 일본 정부의 배외적인 관리정책과 민족차별로 고난의 길을 걸어 왔다.

재일조선인 형성의 이 ‘구조적 역사적 배경’을 상징하는 곳이 역사캠프 참가자들이 방문한 도쿄 고토구의 에다가와다. 전쟁 전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에다가와는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 집단거주지가 됐다. 194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하고자 당시 일제는 도시환경 정비 명목으로 4만명 이상의 재일조선인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에다가와 조선인부락 문제는 식민지 지배가 남긴 역사적 과오이자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역사캠프를 통해 만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씨(29·작가)는 반문한다. “우리는 자신의 국적, 이름을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 ‘정체성’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2010 연중기획

량씨는 두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민족이름과 일본이름이다. 량씨는 이 문제로 내면의 충돌을 겪어왔다. 그는 “결국 이 문제는 재일조선인인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일본 참가자인 이와세 케이코씨(23·대학생)는 “재일조선인이 차별받는지도 몰랐다”며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이때 재일조선인 같은 개인이 받는 역사적 상처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온 참가자 은정인씨(25·대학생)는 “식민지 지배가 남긴 문제를 청산하지 못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역사적 상처가 반복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역사적 상처로 인해 받은 타자의 고통은 결국 기억의 투쟁에 관한 것”이라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