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눈] 새 희망을 제시하라

10년 전이었다. 1999년은 한 세기와 한 밀레니엄을 마감하는 각종 행사로 떠들썩했다. 당시 연구년을 보내던 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12월을 맞이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되는 것은 지나간 시대가 주는 아쉬움과 열리는 새 시대에 담긴 기대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세기말의 그 어떤 복합감정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 불꽃을 바라보며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기대를 품고 21세기를 맞이하던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

2009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해는 2000년부터 시작된 10년의 주기가 마감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경유해 이명박 정부 집권 2년까지 우리 사회는 달려 왔다.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절정을 지나 새로운 시대의 문턱 위에 위태롭게 도달해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사회양극화, 청년실업, 비정규직 노동자, 위기의 자영업 등 세계화가 강제해 온 난제들에 대해 여전히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사회사적 측면에서 지난 10년의 저류를 이뤄 온 것은 정보사회의 진전이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오늘의 것들을 빠른 속도로 낡게 만들고, 내일의 것들의 불확실성을 증대시켜 왔다. 그 결과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경쟁과 속도로부터 가해지는 두려움이 시민사회 전체에 확산돼 왔다. 때로는 촛불을 들고 함께 거리에 나섰지만 짧은 열망의 경험은 이내 긴 절망의 체념으로 바뀌어졌다. 분출하는 욕망은 이제까지 신뢰해 온 가치들의 존재 기반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희망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새로운 시대에 품었던 희망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져 왔다. 희망보다는 절망, 기대보다는 불안이 세대와 공간을 가로지르고 이는 다시 그 어떤 위기의식을 강화해 왔다. 지금 거리로 나가 보라. 학교 가방보다 무거운 학원 가방을 들고 가는 어린 학생들, 졸업했는데도 대학도서관을 떠나지 못하는 20대, 일상화된 ‘퇴출의 공포’ 아래 무기력해지는 30·40대, 기대 수명 ‘100세 시대’가 가까워 온다는데 예순이 되기도 전에 이미 직장을 떠난 이들의 무표정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생히 보여 준다.

역사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와 사회의 구조적 조건이 상호작용한 결과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조건이 너무 강고할 때 인간의 자발적 의지는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조적 조건, 이른바 판을 새롭게 짜지 않고서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 경쟁사회의 원리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교육개혁은 불가능하며, 부동산사회의 원리와 가부장사회의 원리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양극화의 해소도 양성평등의 진전도 모두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의 눈

문제는 다시 정치다. 사회의 판을 새롭게 짜기 위해서는 정치가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적극 추진해야 함에도 여전히 우리 정치 세력들은 국민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도 전략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실현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구조적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정치가 부재하는 한 희망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이 땅의 정치세력들이어 부디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 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