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책]아름답게 지기로 결심할 때 진짜로 이긴다

우아한 패배

한완상 지음 | 김영사 | 2만3000원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말’을 기록한 책이 나왔다. 저자가 1993년 5월15일부터 2009년 8월21일까지 계간지와 일간지, 인터넷 블로그를 포함한 각종 매체와 한 총 25차례의 인터뷰와 대담을 모았다.

시간적으로는 16년에 걸쳐 있지만 인터뷰와 대담의 화두는 통일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집약된다. 암울했던 시절 군사독재의 반민주성을 줄기차게 비판한 지식인이자 5·16 쿠데타 이후 첫 문민정부에서 초대 통일부총리를 지낸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 큰 틀에서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씁쓸한 징표이기도 하다. 책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문제의식 또한 그에 상응해 놀라우리만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저자는 냉전질서를 바탕으로 기득권을 도모하는 세력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1999년 <창비>에 실린 리영희 선생과의 대담에서 저자는 “양쪽의 강경 권력 주체들은 공식적으로는 서로를 주적으로 규정하면서 대응해 왔는데, 무슨 불행한 사건이 생겨 남북 간 위기가 조성되면 항상 그 위기로 인해 한편으로는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 권력 주체가 각기 체제 안에서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켜 왔다”고 말했다. 남북 기득권 세력이 상대방의 적개심을 민중의 반발을 억누르는 알리바이로 사용함으로써 결국 상대방의 기득권 유지를 뒷받침하는 ‘적대적 공생’을 해 왔다는 비판이다.

역대 민주 정부들은 정권 출범 초기에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어느 순간 급격하게 개혁의 동력을 잃고 좌초하는 실패를 반복했다. 저자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먼저 개혁은 혁명과 달리 전선이 분명하지 않아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어렵다. 또한 혁명은 반혁명 세력을 초법적으로 제압할 수 있지만 개혁은 민주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중심부에는 냉전 세력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렵다. 이 때문에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 세력이 응집해 단단한 ‘개혁의 몸통’을 만들어야 하는데 역대 민주 정부들은 거꾸로 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MB 정부를 20세기초 유럽 파시즘의 유사품이라고 본다. 현 정권은 거대한 건축공사를 즐긴다는 점, 정부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공권력을 강화한다는 점, 권력이 재벌의 금권력과 밀착해 국정을 운영하려 한다는 점, 실제로는 약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말로만 서민 중시를 외친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유사하다. 이 같은 민주주의의 후퇴는 또다시 냉전 근본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이주의 책

“우아하게 지기로 결심할 때 진짜로 이긴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아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언은 “깊은 자기 성찰에서 나온 자기 비움의 메시지”였고, 그것이 “감동과 깨달음의 파동”을 일으켜 500여 만명의 시민들을 불러모았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은 자기를 비워 남에게 희망과 용기를 채워줄 수 있는 힘이기에 아름다운 선순환을 작동시키지요. 사랑의 힘이어야 우아한 패배를 통해 평화를 세울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랑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습니다.” 우리 시대를 휩쓸고 있는 보복의 논리에 대항해 저자가 내세우는 사랑의 논리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