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이 만난 사람]한국고전번역원장 박석무

“다산의 실용주의는 법을 최측근부터 적용하는 것”

“고전번역이란 게 한문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지식이 필수입니다. 고전에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 자(字)와 호(號), 벼슬이름이 튀어나오는데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고사성어의 출처나 쓰임새가 궁금할 때, 책을 보다가 괄호 안에 적힌 한자의 뜻이 알쏭달쏭할 때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DB) 사이트(db.itkc.or.kr)에 접속해 단어 검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해 전에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를 검색창에 입력해 보면 고전번역서 6건, 조선왕조실록 85건, 문집총간 104건 등 모두 216건의 문건이 나타난다. 이들 문건에 당동벌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 원하는 문건에 들어가 노란색 커서를 클릭하면 우리 선조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어휘를 사용했는지 용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사이트를 개설, 운영하는 곳은 한국고전번역원이다. 고전번역원은 민간 기구인 민족문화추진회(민추)에서 해 오던 고전의 수집·정리·번역 작업을 국가가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설립된 정부 기관이다. 2007년 12월 공식 출범했으니 두 달 뒤면 설립한지 만 2년이 된다. 그동안 디지털화한 자료가 한국문집총간 663종 330책, 글자 수로 치면 약 1억6500만자 된다. 국내 최대의 디지털 고전 도서관이 생긴 것이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지면의 성격에 맞지 않게 특정 인터넷 사이트를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 세금을 들여 좋은 사이트를 탄생시킨 만큼 더욱 많은 사람이 이용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학생이든 일반인이든 한 번만 이용해 보면 “이렇게 편리한 사이트가 있었나”하며 감탄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문이다.

이번 주 인터뷰 대상자를 고전번역원의 박석무 원장(67)으로 정한 것도 그가 이 도서관 운영의 총 지휘자이면서 국내 최고의 고전 전문가라는 점을 감안한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에 관한 연구로 잘 알려진 그를 통해 고전의 의미와 묘미는 어디에 있고, 우리나라 고전 번역은 어디까지 왔는지 들어보자는 취지다. 인터뷰는 지난 6일 고전번역원 원장실에서 있었다.

원장 취임 2년이 다 돼 가는데 그동안의 번역원 일에 대해 자평을 먼저 해 주시겠습니까.
“고전번역원의 모토가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입니다. 정말 멋진 말이죠. 저는 초대 원장으로서 이 모토를 최대한 실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시골 집에 가면 벽장에 옛날 책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전을 가슴이 아니라 벽장에 넣어 두는 셈이죠. 그래서 한문고전을 자문하는 대국민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 서비스 이용 건수가 지난해에는 675건에 불과했는데 올해는 9월까지 1500건이 넘었어요. 일반인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거죠. 또 고전 DB는 세계 각국에서 매일 접속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연구활동하는 데 무척 편리하니까요. 번역과 서비스 모두 큰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멋있지만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 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슴에 담으려면 그 내용에 감동을 느껴야겠지만 고전은 어려운 한문으로 돼 있어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해독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원문을 줄줄 읽어도 율곡이나 퇴계 문집은 번역본이 없으면 한 줄도 못읽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번역원의 종합 DB는 고전의 대중화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래도 고전번역원의 존재를 국민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번역원 일을 설명하려 해도 통화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의원 비서관들이 ‘고전번역원장’이라고 하면 무엇하는 사람인지 몰라 잘 바꿔주지 않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前) 국회의원 박석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바꿔줍니다. 속상할 때가 많죠.”

실무적인 어려움은 없습니까.
“우리 번역원에서 1차 번역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고전이 6000여 권입니다. 그런데 여러 여건상 우리가 번역할 수 있는 분량은 1년에 60권 정도예요. 이 속도라면 1차 번역을 마치는 데만 10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국가가 불요불급한 사업에 돈을 쓰지 말고 고전 번역을 촉진하는 데 지원을 늘려 줬으면 합니다.”

번역원 예산이라고 해 봐야 100억원도 안되는데 마음만 먹으면 2배, 3배로 늘려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돈을 많이 투입한다고 번역 작업이 무조건 진척될 수는 없어요. 번역할 수 있는 인적 자원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국가의 번역 잠재력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번역원에서 전문 번역자를 양성하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 국가에서도 예산을 차근차근 올려주는 게 바람직합니다.”

한문 번역을 할 사람이 그렇게 없나요.
“내가 자랄 때 한문은 배워봐야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사회적 활용도가 제로였죠. 그러니 특별한 집안 출신이 아니면 한문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인재가 있을 수 없죠. 가끔 예외적으로 한문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들 태반은 배경지식이 부족합니다. 고전 번역이란 게 한문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지식이 필수입니다. 고전에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 자(字)와 호(號), 벼슬 이름이 튀어나오는데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번역자가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자격 조건이 한글 실력입니다. 원문의 뜻을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해도 우리말로 알기 쉽고 매끄럽게 풀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박 원장은 자칭 ‘한문의 네이티브 스피커’이다.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문을 듣고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전남 무안의 그의 집은 당시 동네 어른들의 한문 사랑방이어서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하는 대화가 늘 문틈으로 새 나왔다고 한다.

그때 또래 아이들은 한문을 전혀 모를 것 아닙니까. 혹시 왜 나만 이 어려운 걸 배우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아니에요. 저는 어릴 때에도 한문이 아주 재미있었어요. 심부름하면서 어른들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가 무슨 말인지 막내 삼촌에게 물어보곤 했죠. 남들은 모르는 것을 나만 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배우고 익힌 실력으로 그는 고교 때 사서(四書)를 뗐다고 한다. 이후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네 차례 옥살이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전 연구를 하게 됐다.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것은 13대, 14대 국회의원이란 자리였지만 고전학자로서의 내공은 교도소에서 다져졌다. 정계를 떠난 뒤 그가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다산연구소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등으로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교도소에서 쌓은 내공 덕분이다. 다산의 방대한 연구 업적이 18년 유배생활에서 나왔다는 역설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가 다산의 서간문을 번역해 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오늘날 그를 최고의 다산 연구가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그 책이 나온 게 1979년이니까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지금도 독자들이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그 책을 낸 출판사(시인사)는 지금은 작고한 내 친구 조태일 시인이 운영하던 곳인데 7쇄인가 8쇄인가 찍고 문을 닫았습니다. 판권이 창작과비평사로 넘어갔죠. 여기서 기존의 글을 손보고 새 글을 추가하는 식으로 해서 개정판을 낸 게 1991년입니다. 이후 꾸준히 팔려 지금까지 26쇄, 도합 20만부쯤 나갔다고 해요. 신문에 광고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놀랍지 않습니까. 다음달 출간 30년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책의 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연애편지를 쓸 때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도 좀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산의 이 편지들은 아들에게, 형에게 보낸 것이어서 진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다산의 인간적 면모와 세상 및 학문에 대한 관심사를 볼 수 있죠. 장기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그게 원장님이 언젠가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상고(尙古·옛날을 숭상하는 것)라는 건가요. 복고(復古·옛날로 돌아가는 것)가 아닌.
“그 말보다 호고(好古)라는 말이 좋겠네요. 호고는 옛 것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공자의 기본 사상입니다. 공자는 호고가 유학의 기본이라고 보았어요. 호고하지 않으면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당대 최고의 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유명한 시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대목에서 그는 취재노트를 달라고 하더니 시를 직접 적어 줬다. ‘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연경누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 옛 것을 좋아해 때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며칠 동안 시를 짓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박 원장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면 흔히 추사체 글씨를 얘기하는데 글씨보다 학문이 더 탁월한 분”이라면서 “다산이 자기보다 25살 아래인 추사의 학문을 보고 탄복했을 정도”라는 강조했다.

옛 것만 좋아하면 새로이 쏟아지는 신 기술, 신 문명은 어떻게 합니까.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 역사를 창조한다, 이게 인간이 할 일입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이를 위해 호고부터 해야 하는 겁니다.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호고를 하는 것이지요.”
이제 다산을 이야기할 차례다. 다산 연구가와의 만남에서 다산을 화제에서 빼놓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그는 다산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풀어쓰는 다산이야기’를 35만 회원들에게 보내고 있으며, 몇년 전에는 이를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웬만한 다산 관련 질문은 독자들에게 구문(舊問)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이런 땐 우문(愚問)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평생 다산을 연구하셨는데 다산은 어떤 분입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세상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불세출의 학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자세나 미래를 보는 예견능력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가 손을 안 댄 학문 분야는 사실상 없어요. 그런데 손 댄 분야에선 거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정치가·행정가였으며, 당대 최고의 의사였고 지리학자였고 과학기술자였습니다. 외국으로 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유형의 학자라 할 수 있겠지요. 그의 민주주의 의식이나 경제 평등 논리는 지금의 가치 기준으로 보아도 진보적이에요. 하향식 정치를 상향식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서자와 적자를 차별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토지를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거든요. 그는 200년 전의 학자가 아니라 오늘의 학자예요.”

다산은 실용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다산은 모든 것이 백성에게 실익이 돼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런 점에서 분명한 실용주의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실용을 외친 것은 아닙니다. 도덕성을 기본으로 한 실용주의를 얘기했죠. 실용주의의 또 다른 말이 법치주의입니다. 참다운 실용주의를 하려면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법대로라면 실용이 아닌 거죠. 다산은 ‘용법 의자근습시(用法宜自近習始)’, 즉 법을 적용하려면 최측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상주(上奏)했습니다. 위장전입, 세금탈루와 같은 법 위반 사례를 가까이 두고 법대로가 되겠습니까.”

다산은 인재 등용이 통치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요즘 정부의 인사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용인(用人)과 이재(理財) 이 두가지가 가장 중요한데 어느 정부든 용인을 잘 못하더라고요. 김대중 정부 때도 그렇고 노무현 정부 때도 그렇고요. 노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다산을 국가경영의 역할 모델로 삼을까 검토한다고 하더니 에이브리햄 링컨으로 바꾸더군요. 이유를 들어보니 다산은 실패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다산이 백세무선치(百世無善治)라고 했나 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정치는 안 나온다고 말입니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

다산의 사상을 한두 단어로 압축한다면 무엇이라고 봅니까.
“(이 또한 조금 생각하더니) 개혁과 청렴입니다. 다산이 살던 시기는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다산은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도 개혁을 위해 <경세유표>를 집필합니다. 그런데 <경세유표>를 다 쓰기 전에 <목민심서>를 새로 씁니다. 당초 생각한 제도 개혁이 기득권층의 반대로 요원하다고 본 것입니다. 법을 고칠 수 없다면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라를 좋게 하는 방안이 뭐냐, 공직자의 청렴이 제일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다산이 강조한 개혁과 청렴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가치 아니겠습니까.”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