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오지에서 보낸 한 달 안식월수영 글, 박병혁 사진, 황소자리, 2008
‘열대 오지’라는 말과 ‘안식월(安息月)’이라는 생소하지만 매혹적인 어휘에 이끌려 이 책을 샀다. 안식년은 익숙하지만 안식월은 낯설다. 잘 나가는 대필작가(代筆作家), 즉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로 ‘빡센’ 삶을 이어온 저자의 ‘무작정, 무조건’ 떠난 여행기! 두 딸과 남편을 두고, 프리랜서 작가로 끝없이 밀려드는 일에 파묻혀 살던 ‘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지구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오지”로 떠난다. 일과 일의 매개로 엮인 세상과 관계들, 가족, 일상, 그 모든 것을 떨치고 떠난 것은 자유와 휴식의 간절한 욕구,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간절한 욕구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욕구는 어제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의 기획에 맞닿아 있다. 누구나 도덕, 정치,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 포박되어 있고, 일상의 책임과 의무라는 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다. 그것들이 삶을 묶고 우리 입에서 비명이 터질 때까지 뒤튼다. “삶이 너무 많이 뒤틀려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훌쩍 떠났다.” 이 책은 필리핀 오지에서 보낸 한 달의 기록이다. 저자는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 원시의 시공간과 만날 때마다 마음 안쪽에 이는 파문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이 책을 가벼운 일상 탈출기, 오지 체류기로만 읽는다면 이 책의 진수를 놓치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이며, ‘나’를 묶고 있는 것들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분투기,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고 회복으로 나아가는 자기고백서다. “아이들 학교에 갈 시간에 맞춰 옷을 안 입혀도 되고 올 시간에 맞춰 밥을 안 해도 되고 잔소리를 안 해도 된다는 것. 남편에게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담배 냄새를 안 맡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이 충전되는 것 같았다. 아줌마로서 내 인생의 해방은 이렇게 작고 사소했다.” 활달하고 투명한 문장으로 펼쳐 보이는 날카로운 성찰적 사유들은 문득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인생은 전혀 가보지 않은 길에 의해 이끌려간다.”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으랴! 우리 삶은 가보지 않은 길들이 이끌고 간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오지다. 원시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린다. “무연히 창밖을 보거나 하늘을 보거나 꽃을 볼 때마다 콧등이 시큰해져왔다. 가끔은 울컥울컥 이유 없이 눈물이 솟기도 했다. 햇빛 아래 세상이 이렇게 티 없을 수 있다니!” 이 여행 중에 ‘나’는 여러 번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상처가 있다는 것이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나를 누가 울게 했는지 몰라도 눈물의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았다. 묵은 상처의 자리다. 오래된 상처일수록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결국은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맺힌 것을 털어내면 마음에 빈 자리가 생긴다.”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삶이 있다. 울타리 안쪽의 삶과 바깥의 삶. ‘나’는 울타리 안쪽의 삶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이다. 어느 날 문득 울타리 안쪽의 삶에 멀미를 느끼던 차에 바깥의 삶은 어떨까 하는 동경과 호기심이 걷잡을 수없이 팽팽해졌다. 그래서 여행 가방을 싼다. “뚜게라가라오로 갈 때는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보자는 각오를 했다. 옆으로 멜 수 있는 가방 하나에 들어가게 짐을 꾸렸다. 속옷 두 벌, 바지 한 벌, 티셔츠 두 벌, 신발 한 켤레, 손수건과 약간의 돈. 왠지 짐이 적어야 할 것 같았다. 욕망이 크면 부끄러움이 될 것 같아 감추려 한 것이다.” 여행 가방은 우리 마음 안에 작동하는 욕망과 금욕의 경계를 잘 보여준다. 욕망을 몸의 제한된 한계 안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무용한 것들을 다 걷어내고 최소한의 간소함으로 사는 금욕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불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삶이라는 여행 가방 안에 너무나 많은 것을 담는데 시간을 다 쓰느라 정작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행 가방은 항상 우리의 금욕을 요구한다. 여행 가방이 요구하는 금욕을 따른다면 여행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 가방 안에 항상 더 많은 욕망을 구겨 넣는다. 그래서 여행은 그 무겁게 채워 넣은 여행 가방 때문에 고단한 여정이 되고 만다. 대개 인생의 고난과 시련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들이다.
필리핀 오지의 평화로운 광경. ⓒ박병혁
자, 울타리 바깥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멀고 낯선 오지로 날아간 주인공은 그가 원한 것을 찾았을까? “그렇게 찾던 고립된 곳, 정신이 독립할 수 있는 곳, 오지에서 나는 만세 삼창을 부르기는커녕 걱정에 시달렸다.” 처음부터 자유와 안식을 찾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나는 늘 습관에 굴복했다. 끊임없이 인터뷰하거나 취재해서 원고를 써댔다. 일감이 없으면 불안해서 동시에 몇 개씩 일을 했다. 내 얼굴은 고단함으로 찌들었고 늘 건조한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습관에 굴복하고 일중독에 빠져 사는 자기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피로는 도시인들이 앓는 하찮고 사소한 질병이다. 피로 때문에 죽지는 않지만 피로는 삶의 쾌적함을 고갈시킨다. 피로는 삶의 질을 좀먹는 질병이다. 그 질병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첫 단계에 들어서는 법이다. “그날 나는 한 가지를 다짐했다. 만약 내가 일을 해야 한다면 다시는 참담한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 지독한 끌림 혹은 기꺼운 복종만이 내 삶의 원칙이 되리라는 것.”
오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잘 웃었다. 모두 더 할 수 없이 최저 수준의 생계를 꾸리는 가난에 처해 있고, 들여다보면 시름 많은 조건을 안고 있는 데도 그들은 잘 웃는다. 행복할 리 없는 사람들이 잘 웃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웃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일어난다. ‘나’는 그들의 웃음을 보며 나 자신을 돌이켜본다. “20년 전만 해도 나는 웃음이 헤펐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는 종종 웃어서 어른들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내 속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영혼이 맑고 순수할 때 잘 웃는다. 아, ‘나’도 한때 잘 웃는 사람이었구나 ! 그 많은 웃음은 다 어디 가고 ‘나’는 더 이상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구나! 삶이라는 노역에 휘둘리다 보니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노트북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되니 전기가 없는 오지에서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오지에서는 안경도 시계도 굳이 필요없다. “안경을 벗어 가방에 넣고 시계도 풀어버렸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자 나는 비로소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의 도구인 안경, 시계, 노트북은 신체 능력을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몸과 의식을 예속한다. 그것들에 기대 사는 동안 우리 몸과 마음은 어느덧 그것들의 현존 속에 매몰되어 그것들과 함께 흘러간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 몸의 일부인 듯 기능하지만 사실은 문명 세상에 예속을 강화한다. 그것들을 벗어버리자 “쉬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진정한 휴식에 든다. 깊은 휴식 속에서 제가 갖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자 비로소 느린 시간의 흐름과 만난다. “고민 없는 세상에 섞여 있으면 시간도 천천히 흘러간다. 아침을 먹은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침을 뚫어져라 쳐다본 적도 있다. 그러나 초침은 정확하게 째깍 하고 움직였다.” 오지를 찾기 위해 내려놓은 것은 일, 관계, 의무, 바쁨이다. 그것들을 내려놓자 그것들에서 비롯되는 잦은 두통과 불안과 걱정도 사라진다. 그리고 찾은 것은 애초에 갖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 즉 자유, 안식, 느림, 웃음, 낙관 등이다. 당장 오지로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열대 오지에서 보낸 한 달 안식월’은 책값이 결코 아깝지 않다. 이 책을 붙들고 있는 몇 시간 동안의 행복은 책값의 몇 배를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장석주>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