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을 사유하자’
니콜 라피에르·이세진 옮김·푸른숲·2007
낯익은 것들은 편안하다. 그 편함에 길들면 편한 것을 규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편협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편협함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 지역의 관습과 체험을 우상으로 섬긴다. 그러면 차이에 대한 열린 마음을 잃고 폐쇄적인 지역주의자가 될 수 있다. 몽테뉴는 그런 사람을 이렇게 꼬집는다. “저마다 자기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 부른다.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고장의 풍습이나 견해에서 얻은 사례나 관념만이 오로지 진리나 이성의 규범인 것처럼 생각한다.” 모험과 변화를 거부하는 정주(定住)는 폐쇄, 범주, 분류, 위계, 배열의 관념 속에 자기를 가둔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안주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는 점점 더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는 운명으로 우리를 밀고 나간다. 이미 정주의 역학보다는 이동, 이주, 이산, 망명, 유배 들에서 비롯된 전환적 사고가 오늘의 삶을 만드는 더 중요한 조건이다.
사람들은 늘 어디론가 떠난다. 공항이나 기차역은 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공항이나 기차역에 나가면 알 수 없는 희열 때문에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눈앞의 세계가 돌연 생기를 띠며 무겁고 탁한 공기는 신선한 것으로 바뀐다. 공항과 기차역에서는 짐을 바리바리 들고 있다 하더라도 매임이 없는 마음은 한없이 가볍다. 떠나온 곳과 떠나갈 곳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이미 방랑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공항, 기차역, 통행로, 선착장 들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곳, 경유지, 중간지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횡단의 시발점들, 즉 문·문턱·창구·통로들과 더불어 이런 곳들은 ‘사이’이자 ‘중간’ 지대다. 자크 데리다는 이런 곳들을 “정의되지 않은 방향 전환의 거처”라고 말한다. 중간지대는 개와 늑대가 출현하는 곳이며, 여행자와 도둑과 부랑자와 살인자들이 떠도는 공간이다. 중간지대는 위험한 지대이며, “자연과 문화, 야성과 길들임 사이”의 카오스가 일어나는 지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가는 자들은 제 신체에 새겨진 법과 권위, 그리고 관습의 포획에서 자신을 탈영토화하며, 반드시 이 중간지대를 거친다.
나는 공항과 기차역에서 ‘안쪽‘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저 바깥의 부름을 듣는다. 물론 그것은 환청이다. 내 몸은 정주민의 그것인데, 내 심장은 디아스포라, 이주민의 그것으로 뛰고, 내 살은 불복종과 저항의 DNA를 가진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항과 기차역은 바깥으로 나가는 횡단의 시작점, 그 문턱이다. 문과 문턱은 공간의 분리이자 연결이다. 문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자, 안과 밖, 성과 속, 공과 사의 경계에 놓여 있는 전환지대다. 다리는 강의 이쪽과 저쪽으로 분리된 땅을 연결한다. 다리는 “강 저쪽의 욕망을 실현”하는 자리이며,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성찰의 공간으로 간격과 이행을 지속”시킨다.
문밖의 세계는 문안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다. 문밖으로 나선 자들은 모두 이방인들이다. 나는 항상 “바깥을 사유하는 자”, 내적 이주자, 정신의 난민으로 살아왔다. 바깥을 사유하는 자, 항상 지평선 저 너머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자기가 속한 사회의 관습과 권위들은 갑갑하고 불편한 족쇄다. 그들은 문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문밖의 세계를 사는 자들이다. 이방인들은 세계의 낯섦 때문에 망설이고, 의혹의 눈초리를 주위에 던지고, 그 낯섦에 가위눌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디서나 눈에 먼저 띈다.
니콜 라피에르
자기 땅에서 살지 못하고 바깥으로 내쳐진 자들은 불가피하게 삶의 안쪽에 고독과 구도의 자취를 새기면서 산다. 안에서 내쳐진 사람들은 바깥으로 연결된 이동, 초탈, 망명의 탈주선을 따라간다.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방인들은 ‘중간’ 혹은 ‘사이’의 존재들이다. 이방인이란 항상 창조적 일탈의 잠재성을 갖고 경계를 넘는다. 경계를 넘은 자들은 운명적으로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에 새겨진 비결정성은 잠재적 위험이다. 그 비결정성은 언제든지 그 무엇으로, 즉 전복과 위반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관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위기나 그 징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이방인은 종종 고통스러운 혜안으로 세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혹은 정상적인 사고의 모든 토대를 위협할 수 있는 위기를 알아본다.” 이런 이방인들은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이하(李賀), 굴원, 사마천, 보들레르, 랭보, 니체, 카프카, 카뮈, 벤야민, 파울 첼란, 이상, 윤이상, 에드워드 사이드, 셀만 루시디 같은 사람들은 그 당대의 삶에서 파편으로 떨어져나와 떠도는 사람들, 즉 ‘시적 광대, 뿌리를 잃은 유목민, 영원한 부적응자’다.
한나 아렌트는 이들이 “인간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추상적인 헐벗음”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오늘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그 본질에서 경계나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자, 떠도는 자다. 망명자, 이주자, 전향자로 살 수밖에 없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실제로 국경을 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몸은 여기에 두고 늘 저기 먼 곳을 바라보며 산다. “거리두기, 사회규준이나 권력 중추 및 기관들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바로 그 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그곳의 긴장과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마흔여덟 살에 집과 아내를 버리고 심지어는 객사의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다른 공기를 마시는 희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세계를 떠돌았다.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파리에서 살며 파리에 대한 방대한 저작물을 준비하던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포획하는 손길을 피해 국경을 넘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스페인 국경지대의 작은 마을에서 치사량의 모르핀을 먹고 자살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주의 역학에서 뛰쳐나온 자, 문명의 횡단자들, 자발적 이탈자들, 월경(越境)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넘어섬, 여행은 왕복이 아니라 편도다. 대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주인공 이명준이 그 좋은 예다. 이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 뒤 그곳을 향해 가던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게 그는 자기가 선택한 길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편도임을 증명한다. 이들은 왜 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가는가. 왜 문과 문턱을 넘으려고 하는가. 저기, 다른 곳에 무엇이 있는가. 이들은 길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은 없으나 걸어가면 길이 만들어지고, 뿌리는 언제나 도로에서 생겨난다고 믿은 사람들이다. 그 자신이 내적 이주자로 평생을 산 에드워드 사이드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음과 같은 12세기 수도사의 말이다. “조국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은 향락주의자다. 온 대지가 조국인 사람은 이미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유배지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
지평선을 향해 걷자. 여기가 아니라 저곳을 사유하자. 저곳을 사유하는 자들은 국민·민족·국가라는 영토에서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래야만 인습적 지각을 그칠 수 있다. 그래야만 이방인 노릇하기, 혹은 이방인의 자리 차지하기가 가능해진다.
국민·민족·국가에서 탈영토화함으로써 제 내면에 새겨진 그것의 억압성과 폐쇄성을 지우고 타자를, 타자의 다름을 끌어안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상징적 권력들을 포기하고, 인습적 사유와 절연한 뒤 경계인, 사이의 삶을 수납한다. 사이는 안과 밖을 매개하고 항상적으로 이행과 변이를 가능하게 한다. 사이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경계 넘어서기, 탈중심화, 우회와 더불어 반성적 사유를 하며, 경계라는 임의적 장벽을 넘어서서 관계의 상호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