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19) 문인의 초상

사진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한국문학사

서정주의 초상은 압권이다. 사진 속에서 서정주는 한복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마치 변소에서 큰일을 보듯 쪼그리고 앉은 40대의 남자다. 성과 속을 한데 갖고 있는 범용한 표정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는 그 눈길은 처연하면서도 도도하다.

육명심·열음사·2007

얼굴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정작 저 자신은 제 얼굴을 보지 못한다. 얼굴은 세상이 ‘나’를 불러낼 때 내 존재의 유일성을 입증해주는 그 무엇이다. 내 얼굴은 남과 구별되는 차이와 타자성을 밖으로 밀어내는 분별의 표지, 기억을 불러오는 촉매의 거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다름아닌 얼굴이 구현하는 차이, 즉 타자성의 기호를 인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72인의 얼굴을 담은 한 권의 책이 있다. 육명심의 사진집 ‘문인의 초상’이다.

육명심의 사진집 ‘문인의 초상’을 펼치는 순간 오래전에 읽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동생인 제롬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52년에 찍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이후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서정주의 초상은 압권이다(140쪽). 사진 속에서 서정주는 한복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마치 변소에서 큰일을 보듯 쪼그리고 앉은 40대의 남자다. “귀신을 보는 나이”라고 했던 40대의 시인은 화강암이 많은 산 능선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다소 삐딱하게 앉아 있다. 성과 속을 한데 갖고 있는 범용한 표정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는 그 눈길은 처연하면서도 도도하다.

육명심은 이 순간 시인의 ‘상가수(上歌手)의 소리’라는 작품을 떠올렸다고 쓴다. 이 작품은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 질마재의 전설과 소문을 토속어로 버무려 완성한 시인의 절창 시집 ‘질마재 신화’에 들어 있다.

사내는 타고난 목과 신명으로 동네 안팎에서 소문난 가수다. 가수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상가수다. 마을에 잔치나 초상이 있을 때마다 불려나가 소리를 한다. 어느 날 아침 뒷간에서 똥오줌을 퍼나르던 이 사내는 잘 걸러진 묵은 똥오줌 항아리의 수면을 명경(明鏡)삼아 제 모습을 비춰보며 상투 아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망건 밑으로 밀어넣는다. 침을 발라 머리 매무새를 다듬는 이 단장을 염발질이라고 한다.

사진작가는 이승과 저승에 두루 통할 정도로 뛰어난 청과 신명을 가진 이 상가수 사내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시인을 하나로 겹쳐본다. 영욕(榮辱)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느린 채 산등성이에 쪼그려 앉은 이 초상은 그 자세 때문에 일견 매우 불경스럽다. 그 불경함은 시인의 굴곡진 삶과 범상치 않은 내면이 파열하듯이 드러나는 순간 엷어진다.

박두진, 구상, 고은(왼쪽부터)

박두진 초상도 인상적이다(95쪽). 앉은뱅이책상 앞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밑으로 내리 깐 시인의 초상은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앉은뱅이책상에는 원고지가 있고, 그 원고지 위에 무심히 벗어놓은 안경이 놓여 있다. 시인의 등 뒤로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의 모습이 흐릿하다. 넓게 드러난 이마, 꽉 다문 입매무새, 게다가 반쯤 감고 내리 깐 시인의 눈. 이 얼굴은 그 자체로 시인의 올곧음을 지향하는 의지의 내면세계다. 소중한 것을 보호하듯 얼굴을 두텁게 감싼 큰 손! 세속의 일과는 무관하게 제 사유에 몰입한 저 단호한 자세에 서린 침묵은 완강해서 그 자체로 강한 자기주장으로 읽힌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시인의 단정한 자세는 세속의 잇속과 흐트러진 풍속에 대해 매우 비타협적이다. 과연 박두진의 실제 삶도 그러하였다.

구상의 초상(31쪽)과 고은의 초상(25쪽)은 대조적이다. 구상은 묵상이라도 하듯 적막한 자세로 앉아 있고, 고은은 앞저고리 섶을 열어젖힌 채 파천황(破天荒)의 웃음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구상은 산책에 나섰다가 긴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팡이를 짚고 거기에 두 팔을 의지한 채 묵상에 잠긴 짧은 백발의 시인은 마치 수행이 깊은 가톨릭 사제 같다. 희게 드러난 이마에는 가로로 깊은 주름이 하나 새겨져 있는데, 그 패인 주름은 시인의 영성(靈性)과 인간적 고뇌를 숨기지 못한다. 학과 같이 무심한 듯 고고한 시인의 자세는 사제의 서양적 예지를 동양적인 대인군자의 풍모로 바꾸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반면 파안대소하는 고은은 장돌뱅이의 장난기와 민주투사의 당당함과 천재시인의 퇴폐가 한데 어우러져 인생의 화통한 한순간을 체현하고 있다. 이제 막 40대로 진입했을 시인의 등뒤 벽에는 금주(禁酒)라고 붓으로 휘갈긴 백지가 붙어 있다. 술은 천부의 다산성으로 한국문단을 쥐락펴락하며 종횡하는 시인의 유일한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금주 딱지는 그 장애물마저 넘어서겠다는 작심의 한 표현이겠는데, 시인은 벗들과 만나면 금주 결심 따위는 까맣게 잊고 태연하게 대작했을 것이다. 고은 앞의 너른 앉은뱅이책상 주변은 온갖 기물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어수선한데, 그 어수선함이야말로 다산성의 생산현장답지 않은가! 과연 구상은 구상이고 고은은 고은이다.

창가를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처럼 찍힌 김춘수의 옆모습은 단단하면서도 차디찬 광물성이다(81쪽). 역시 감정을 절제하고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간결하게 형상화한 시인의 초상답다. 이 광물성의 인상은 세 개의 유리에서 연유한다. 화면의 3분의 2를 두 개의 면으로 구획짓는 유리문, 시인이 걸친 안경의 유리, 화면 하단을 받치고 있는 테이블 위의 유리. 시인의 옆모습은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강직한 직선의 검은 창틀에 갇혀 있는데,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흑과 백의 대조가 강한 화면 속에서 시인의 염결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난 화분이 놓인 테이블의 유리는 흐릿하게 이 흑백의 풍경을 비춰내고 있다. 화면 하단 왼쪽에 무심하게 놓인 화분에는 붓질이 방금 지나간 듯 허공에 뻗은 몇 가닥의 난초 잎이 검은 선으로 개결하다. 난초 화분과 시인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허공에 뻗은 난초 잎의 개결함이 강조될 때, 그것은 시인의 정신적 표상인 듯 돌연 신경질적이면서도 세심한 의도를 가진 배치로 바뀐다.

서정주

그밖에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은 강우식(12쪽), 딸과 함께 찍은 강은교(19쪽), 오태석(181쪽), 이승훈(217쪽), 천상병(262쪽) 초상 등이다.

독서일기

사진작가에게 그가 찍은 얼굴들은 하나의 과녁이자 대상물이다. 다시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나는 동시에,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나라고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사진가가 나라고 믿는 사람, 그리고 사진가가 자신의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다. 인물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육명심표 문인 초상 사진은 바르트가 말하는 “네 가지의 상상적인 것”의 교차와 변형을 드러낸다. “사진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한국문학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1967년 대학 은사인 박두진의 얼굴을 찍은,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육명심은 1970년을 앞뒤로 문인들의 잇단 요청에 따라 얼굴 사진을 찍게 되는데, ‘문인의 초상’은 그 시절의 결과물이다.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