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한맺힌 역사 100년 만의 귀환

북관대첩비 귀환에 얽힌 사연… 초산 스님·김원웅 의원 ‘결정적 역할’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무찌는 용맹스런 이야기는 세상에 명성이 높다. 해상에선 이순신의 한산도 대승리, 육지에선 권율 도원수의 행주산성 승리, 또 연상성에서 전과로 이월천(이정암)의 승리가 있다. 그러나 이는 무장(武將)에 있는 공적(功績)이며 여기서 분명한 것은 10인, 5인의 의병이다…”(북관대첩비 비문 중에서 일부 해석)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지난 10월 20일 일본에서 돌아온 북관대첩비가 일반에 공개됐다. 우리나라의 위엄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 용산에 새 위용을 드러내는 개관행사에 맞춰서다. 일제 때 약탈돼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방치된 지 꼭 100년 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일인 10월 28일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꼭 100년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비석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다시 돌아왔는가. 일본 군구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 숨어서 역사의 아픔을 견디어 왔던 만큼이나 기구하고 고통스런 과정이 있었다.

2000년 4월 어느날, 초산 스님(한일불교복지협회장·76)은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일본의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이라는 스님이 뵙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인은 가키누마 스님이 귀무덤, 코무덤의 한국 환국을 도왔고, 사재를 털어가며 수년째 북관대첩비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인사라고 알려줬다. 이날 로얄호텔에서 두 노승의 만남이 북관대첩비 귀환 작업의 시작이다. 가키누마 스님은 일본에서, 초산 스님은 한국에서 귀환작업을 하기로 의기투합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스님의 인연은 하나의 당혹스런 사건으로 더욱 끈끈해졌다. 초청을 받고 일본에 도착한 당일 초산 스님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한다. 가키누마 스님이 뇌혈관 파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초산 스님은 다음날 아쉬움을 남긴 채 귀국 준비를 서두르는데 믿어지지 않는 전화를 받았다. 가키누마 스님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가키누마 스님이 ‘죽더라도 초산 스님을 만나겠다’며 병원을 빠져나온 것이다. 이런 두 노승의 신의와 우정이 북관대첩비 환국추진 범국민운동본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2004년 유난히도 뜨거던 여름날,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초산 스님은 “외롭고 힘들게 북관대첩비 환수를 추진해왔다”는 설명을 했다. 정치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김 의원은 그 길로 초산 스님을 찾아 “힘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김 의원은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에게 북관대첩비 반환을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답신은 매우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었다. 다시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외부성 장관과 야스쿠니 신사의 남부 도시아끼(南部利照) 궁사(宮師)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비슷한 반응이었다.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에, 야스쿠니 신사는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는 판이었다.

김 의원은 초산 스님과 함께 지난 3월 1일 무작정 일본 외무성을 찾아 장관 면담을 요청했다. 김 의원은 “장관 면담을 하지 못한다면 외무성 수위를 만나서 ‘서신’이라도 전달하고 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만났다. 하지만 야치 차관은 “북관대첩비의 소유권은 야스쿠니에 있다”면서 “결정권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고 주장했다. 1965년 한·일조약 중 문화재협정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넘어간 한국 문화재 중 그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 것은 반환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일본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항에 따른 것이다. 만일 북관대첩비를 반환하게 된다면 일제강점기에 넘어간 문화재 3만8000여 개, 임진왜란 때 빼앗아간 문화재 5000여 개에도 불똥이 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수백 점에 이른다.

김원웅 의원은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 신사가 가져간 게 아니라 일본 군부가 가져간 것이다”면서 “원상복귀의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다”고 맞섰다. 일본은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에 일본군이 함경도 길주지방에 진출하여 마침 이 비석을 발견하고는, ‘이곳의 민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철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석은 일본군 미요시 중장의 귀국길에 일본으로 옮겨져 메이지 천황에게 바쳐졌다. 천황은 1909년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김원웅 의원은 이어 “야스쿠니 신사는 법인이지만 한국의 현충원(국립묘지)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은 결국 “북관대첩비의 특수한 성격상 한국에 ‘반환’이 아닌 ‘인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일 남아

김 의원 일행은 야스쿠니 신사로 발길을 옮겼다. 김원웅 의원과 동행한 이종걸 의원(열린우리당)은 야스쿠니 신사 입구부터 삼보일배로 북관대첩비가 있는 곳까지 갔다. 일본 행 비행기 안에서 두 의원은 “우리 조상이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해 너무 부끄럽다는 후손의 마음을 표시하자”고 의견을 모은 뒤 나온 행위였다. 김 의원의 일행을 맞았던 한국인 민족단체 인사들 속에서 “이러다가 야쿠자라도 쳐들어오면 어떡하느냐”는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이미 내친 걸음은 되돌릴 수도 없었다. 민족단체 인사들이 김·이 의원을 둘러막아 섰다. 다행히 불행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 당연히 야스쿠니 신사측도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웅 의원은 “음습한 한쪽 구석에 철망으로 가려져 있는 곳으로 안내됐다”면서 “그런데 세워져 있는 비석은 돌덩이를 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관대첩비 몸체 무게는 400여㎏. 그 위에 1t이 넘는 돌덩이가 북관대첩비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 의원은 “북관대첩비가 뭐냐. 우리에겐 승전비지만 일본의 입장에선 패전비가 되는 것”이라면서 “이는 한민족의 혼을 억누르려는 저급한 일본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성토했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여 숙종 34년(1707년)에 함경도 길주군 임명(臨溟) 땅에 세운 비석이다. 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의병들이 길주 등지에서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을 처형한 공을 기린 내용이 1500여 자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조명

결국 야스쿠니 신사측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가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물론 “일본 정부의 지시가 있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남북한이 합의한다면 한국에 인도하겠다”는 입장을 정했다. 북한은 수교가 되어 있지 않고 북한 길주에 있던 북관대첩비를 한국에 인도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월 2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이해찬 총리와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사이에 당국간 북관대첩비 회담에 공감하면서 사실상 북관대첩비의 귀환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남북한은 11월 2일 개성에서 북관대첩비 ‘인도’ 협상을 시작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