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날개 꺾인 ‘벤처 1세대’

터보테크 장흥순 회장 분식회계 ‘고백’… ‘맏형’경험 되살릴 ‘벤처부활제’여론도

‘벤처 신화의 몰락’
살아있는 벤처의 신화로 불리던 터보테크 장흥순 회장이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9월 29일 기자회견장에 나온 그는 “도의적인 책임은 물론 형사적인 처벌도 모두 받을 테니 회사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4년간 벤처기업협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했던 그의 ‘고백’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더욱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분식회계에 크게 상처받은 여론은 그나마 깨끗하리라 믿었던 벤처기업에서도 같은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분위기다. ‘너마저…’라는 싸늘한 시선이 벤처기업 전체를 압박하는 듯하다. 10월 13일부터 벤처주간을 설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는 등 재도약을 계획했던 관련 업계는 자칫 불똥이 전체 벤처업계로 번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벤처의 대표선수 ‘왜 그랬나’

시간이 흐르고 장 회장의 분식회계는 다른 기업의 부도덕한 ‘범죄’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동정론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터보테크 장 회장의 분식회계는 비자금 형성을 위한 의도적 횡령이 아니라 경영상 판단착오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게 동정론의 핵심내용이다.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터보테크에 문제가 생긴 시점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터보테크의 주가는 4만 원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교적 사업이 잘 돌아간다고 평가되던 올해 9월 중순의 주가가 1800원에서 2000원을 오갈 정도였으니까 무척 ‘잘 나가는’ 상황이었다. 약간의 ‘거품’도 높은 주가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때 840억 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유상증자에 참여해야 하는 장 회장의 입장은 묘했다. 터보테크의 지분 22%를 보유하고 있는 내로라하는 ‘부자’였지만 200억 원에 가까운 증자대금을 현금으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주식을 처분해서 자금을 마련하면 됐지만 분위기상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대주주가 조금이라도 주식을 처분하면 “사업에 자신이 없어서 지분을 줄인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소유지분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이때는 누구도 터보테크의 높은 주가가 도리어 목을 조여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시장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벤처열풍은 한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금융권은 추가담보를 요구했고 장 회장은 회사의 예금을 담보로 제공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긴 균열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점점 커져 갔다. 주가를 회복하면 주식을 팔아 대출금을 갚으려던 그의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700억 원으로 덩치가 커진 균열은 분식회계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타협과 편법을 피해 선택한 정면승부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 셈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함정에 빠진 회사가 터보테크만은 아닐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원 수석연구원은 부동산 담보 대출 비중이 높던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기업이 연쇄부도 위기를 맞는 등 경제가 10년 동안 후퇴한 사실을 예로 들며 “대주주가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난 뒤에 주가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또다른 어떤 문제가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주주의 주식 처분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대안은 불법인 비밀 차명계좌를 운영하거나 주식 또는 회사 예금 담보대출뿐인데 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는 것이다.

벤처 ‘맏형’의 어깨는 무겁다

벤처업계에서 한순간에 무대 뒤로 사라진 ‘스타’들은 많다. 김진호 전 골드뱅크 사장은 주가조작과 횡령혐의로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고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은 2003년 7월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도 실패한 벤처기업인으로 꼽힌다. 이 전 회장은 장흥순 회장과 여러 면에서 닮은 꼴이다. 이 전 회장은 1985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원들과 함께 초음파 의료기기 제조업체인 메디슨을 설립한 뒤 줄곧 벤처 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장 회장이 공동회장을 맡았던 벤처기업협회의 초대회장이 이 전 회장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그리고 주식을 담보로 사업을 하다 무너졌다는 점에서도 이 전 회장은 장 회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코스닥 열풍이 불던 1998년부터 ‘메디슨 연방’을 꿈꾸며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적극적인 벤처투자에 나섰다. 50여 개 관계사를 거느렸지만 주식 거품이 꺼지면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벤처 1세대로서 짊어져야 했던 짐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벤처기업의 투자요청을 ‘맏형’으로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 전 회장의 실패는 곁눈질하는 벤처기업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한편 실패한 벤처기업인을 재평가하고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주목된다. 전하진 인케코퍼레이션 대표는 “실패한 벤처기업인들의 경험과 기술을 쓰레기로 버리는 것은 국가적인 자원 낭비”라면서 “‘벤처패자부활전’을 통해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대표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릴 뻔한 한글과 컴퓨터를 회생시킨 승부사지만 인터넷 투자 실패로 쓴맛을 본 실패한 벤처인의 한 사람이다.

실패한 벤처기업인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벤처기업협회가 5월부터 시작한 ‘벤처기업경영재기지원제도’가 사실상의 벤처패자부활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벤처패자부활전은 이런저런 이유로 재야로 물러난 벤처기업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벤처기업협회 오완진 홍보부장은 “처음 제도가 도입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제도를 통해 다시 벤처 전선에 복귀한 수혜자는 단 한 명도 없다. 1차 접수기간(5월 15일부터 한 달간)에 지원한 3명은 벤처기업협회의 도덕성 평가에서 탈락했고, 2차(6월 15일부터 한 달간)에 접수한 1명은 기술신용보증기금이 실시한 기술·사업성 평가에서 고배를 마셨다.

조명

지금은 그나마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제도가 계속 운영될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신청자격 자체가 까다로운 탓이다. 우선 벤처기업으로 인증을 받고 1년 이상 기업활동을 한 회사의 퇴출 당시 대표이사만 신청할 수 있다. 게다가 현재 신용불량 상태에 있으면 안 된다. 다중 채무를 지게 되는 실패한 벤처기업인의 속성상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오완진 홍보부장은 “당장은 수혜자를 찾는 게 어렵겠지만 극소수라도 지원을 받아 재기하는 벤처기업인이 생겨난다면 문호는 차츰 넓어잘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