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대론데 자살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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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주재해 오는 2027년까지 자살률을 30% 이상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다. 정신건강검진 주기를 10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자살 위해 물건에 대한 관리 강화를 대책으로 제시했다.

[오늘을 생각한다]세상이 그대론데 자살이 줄까

과연 이런 대책만으로 자살률이 감소할까? 참여정부 시기 보건복지부는 ‘제1차 국가자살예방 5개년 기본계획(2004~2008년)’을 수립하고 다양한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생명존중문화에 대한 광고와 예방 교육, 상담 전화 운영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높은 자살률의 근본 원인인 사회구조적 모순은 그대로 두었고, 같은 해 11월엔 노동계로부터 비정규직 양산법이라 비판받은 ‘기간제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서민들이 살고 싶지 않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데, 공익광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당시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1975년 인구 10만명당 31.9명까지 치솟았던 자살률은 1971~1977년 높은 물가상승률로 인한 서민 생계의 불안정성과 유신 독재 정권의 정치적 억압이 배경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잠시 감소했던 자살률은 광주민중항쟁 이듬해인 1981년 다시 높아졌고, 이후 3저 호황과 정치적 민주화에 힘입어 안정화됐다. 1997년 외환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자 자살률은 26.9명으로 다시 높아졌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엔 30.2까지 치솟았다. 즉 최소한 한국사회의 자살률은 생계위기와 정치적 억압이라는 구조적 모순과의 상관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설치 이후 플랫폼에서의 자살은 분명 줄었다. 그러나 자살 방법이 바뀌었을 뿐, ‘자살률 1위국’이라는 오명은 그대로다. 왜 그런가? 사회구조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살고 싶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높은 자살률은 단순한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구조적 요인과 개인의 사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양자를 세심하게 고려하고, 사회모순을 해소해야 한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만들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사회복지 예산을 축소하면서 자살 예방 캠페인만 확대하는 것은 울고 싶은 사람에게 뺨 때리는 격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며 과로 문제에 대한 몰인식을 드러냈다. 노동시간에 대한 미약한 권한마저 기업에 완전히 몰아주면, 우리는 더욱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최근 경제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고, 노인빈곤 문제도 그대로다.

각박해진 일상에서는 가족과 연애, 돈 문제 등 사소한 갈등이 죽음의 방아쇠가 된다. 그러니 어떤 자살도 순전히 개인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사회구조적 모순은 심화시키면서, 자살률 걱정이나 하고 있는 위정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살인자들일지도 모른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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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