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성적이 전부는 아니다. 베트남 국영방송 VTV는 아예 2018년 베트남을 빛나게 만든 최고의 인물로 박 감독을 선정하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59)은 불과 1년 전까지 국내에서는 잊혀진 사람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수석코치로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힘을 보탰지만, 젊은 지도자가 선호되는 세태에 변변한 일자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그랬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벼르던 이역만리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12월 15일(현지시간)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2018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 결승에서 승리한 후 박항서 감독을 헹가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12월 15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에 1-0으로 승리했다. 1차전을 2-2로 비긴 베트남은 합계 3-2로 말레이시아를 누르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08년 첫 우승 이후 10년 만에 차지한 스즈키컵 패권이다. A매치 16경기에서 8승8무를 기록해 세계 최다 무패 기록을 쓴 것은 덤이다.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우승으로 베트남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감독 평균 재임기간이 8개월이라는 ‘감독의 무덤’에서 이뤄낸 결과라 더욱 놀라웠다. 박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활짝 웃었다.
박 감독은 현역시절 다부진 플레이를 펼쳤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국가대표로 뛴 건 1981년 일본과의 친선전 1경기가 전부다. 1988년 은퇴 후에는 트레이너와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쌓아 한·일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축구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냈다.
베트남 축구 역사 새로 써
그해 가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지만 동메달에 그치면서 곧바로 경질됐다. 이후 경남FC·전남 드래곤즈·상주 상무 등 K리그 사령탑으로 9시즌을 보냈다. 상주 상무에서 K리그2(2부 리그) 우승컵을 두 차례 들어 올렸으나 지도자의 능력보다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실력이 크게 부각됐을 따름이다.
박 감독이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은 역설적으로 ‘축구 변방’에 머물던 베트남을 맡으면서다. 지난해 10월 베트남에 부임한 그는 올해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 8월 아시안게임 4강의 업적을 쌓았다. 약속했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0위 진입도 이뤘다. 그리고 10년 만에 스즈키컵 우승으로 베트남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박 감독은 “행운이 겹쳤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현지 언론 <소하>는 “마법을 부리는 위대한 전략가”라고 극찬했다.
박 감독의 성공비결은 상황에 따라 맞춤전술을 짜내는 재단 능력에 있다. 박 감독은 12월 11일 스즈키컵 결승 1차전(2-2 무)에선 과감히 벤치멤버인 응우옌후이흥과 하득찐을 선발로 기용했다. 응우옌 후이흥은 선제골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 휴식을 취한 선수들이 승리를 일궜다. 박 감독이 1차전 때 체력 안배 차원에서 쉬게 했던 33세의 베테랑 스트라이커 응우옌아인득이 결승골을 뽑아냈다.
박 감독은 큰 그림을 그리는 솜씨도 뛰어났다. 베트남에 꼭 어울리는 3-4-3 포메이션을 만들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박 감독이 처음 부임할 때만 해도 베트남은 4명의 수비수를 세우는 포백 전술을 쓰고 있었지만, 제 몸에 맞는 전술은 아니라고 여겼다. 박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연구해보니 스리백이 낫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이 최소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순발력과 민첩성, 스피드, 체력까지 최고 수준이라고 여겼다. 박 감독은 대인방어가 중요한 스리백에 발재간이 뛰어난 수비수들로 기틀을 다진 뒤 공격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다소 투박할지라도 몸싸움이 좋은 선수들을 주로 최후방 수비수로 활용했던 과거와 달리 수비수부터 공격 전개에 나선 것이다. 대신 투지가 좋고 수비가 뛰어난 선수는 중앙 미드필더로 둬 상대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겼다. 박 감독은 “이 전술의 핵심은 양쪽 측면 미드필더”라며 “베트남엔 발 빠르고 활동량이 많은 선수가 꽤 있다. 이들이 전방부터 후방까지 부지런히 뛰면서 수적 우세를 이끌어낸다”고 말했다.
한국서도 결승전 시청률 놀라워
박 감독의 놀라운 성공에 베트남이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즈키컵 우승 직후 결승전이 열렸던 하노이를 포함해 호찌민과 다낭 등 모든 도시는 붉은 옷을 입은 물결로 가득 찼다. 그 붉은 옷에는 대부분 박 감독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베트남 공안부가 우승팀의 전유물인 카퍼레이드를 만류할 정도로 뜨거운 축구 열기였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성적이 전부는 아니다. 박 감독은 베트남 문화를 면밀히 관찰한 뒤 그 문화를 존중하면서 한 발짝 다가서는 자세로 마음을 훔쳤다. 박 감독이 경기를 뛰다가 다친 선수가 조금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항공편의 비즈니스석을 양보한 것이 대표적인 일화다. 베트남어도 영어도 모른다던 그는 이제 베트남 선수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됐다. 베트남 국영방송 VTV는 아예 2018년 베트남을 빛나게 만든 최고의 인물로 박 감독을 선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항서 앓이가 베트남을 건너 한국까지 번졌다는 점이다.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는 이유로 베트남이 출전한 스즈키컵 결승전 2차전 국내 시청률이 지상파(SBS 18.1%)와 케이블(SBS스포츠 3.8%)을 합쳐 21.9%에 달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동남아 축구가 토요일 황금시간대에 지상파에서 중계된 것도 놀라운데 시청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2018 러시아월드컵 결승전이 국내에 중계될 당시 지상파 3사 합산 시청률이 20.7%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청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박항서 앓이는 내년 3월 절정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가 내년 3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친선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겸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회장이 최근 키에프 사메스 아세안축구연맹(AFF) 회장과 만나 “2017년 EAFF 챔피언십 우승팀과 2018 AFF 스즈키컵 우승팀이 맞대결을 벌이자”고 약속한 것이 두 나라의 친선전으로 이어졌다. 두 팀의 맞대결에선 한국이 16승6무2패로 우세하지만 하노이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예측이 쉽지 않다.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좋은 성적을 낸다면 박항서 앓이는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황민국 스포츠경향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