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스파이전 부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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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측근 정보전 책임자로 발탁…러시아 스파이 다시 기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3월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3월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독일 검찰은 지난 3월 19일(현지시간) 독일 연방군에서 군사장비와 정보기술을 다루는 장교 토마스 H를 기소했다. 그는 민감한 자료들을 러시아 스파이에게 넘긴 혐의로 지난해 8월 독일 서부 코블렌츠에서 체포됐다.

3월 1일에는 러시아 언론인 마르가리타 시모냔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독일 공군 고위 간부들이 독일제 장거리 미사일 타우러스의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 등의 대화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독일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올렉시 다닐로우 우크라이나 국가안보보좌관은 이와 관련해 더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러시아의 스파이 네트워크에 대해 독일 파트너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했다”면서 “러시아가 독일 관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독일 공영방송 ARD는 독일 정보기관의 ‘대재앙’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군 조종사, 망명지 스페인서 피살

지난 2월 13일에는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가 스페인의 한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총탄 6발을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쿠즈미노프는 지난해 8월 헬기를 몰고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뒤 신분을 감추고 스페인에서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스페인 경찰은 쿠즈미노프 피살 사건에 러시아 정보당국과 러시아 마피아가 연관돼 있는지 수사 중이다. 지난 2월 7일에는 티호미르 이바노프 이반체프라는 이름의 불가리아 국적 남성이 영국에서 러시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기소됐다. 다른 불가리아인 남성 3명과 2명도 같은 혐의로 영국에서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같은 달 프랑스는 독일, 폴란드, 프랑스에서 가짜뉴스를 전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웹사이트 193개를 적발했다. 유럽의회는 라트비아 출신 의원 1명을 러시아 스파이 혐의로 조사 중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요원 수백명이 추방당하며 유럽에서 존재감을 상실했던 러시아의 스파이 활동이 되살아나고 있다. 서방의 한 정보장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러시아 정보기관은 거대한 기계다. 그들은 이제 되돌아와 늘 하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서방 정보장교는 “러시아의 활동은 냉전 시대와 같거나 더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스파이들은 최근 몇 년간 잇따라 수모를 겪었다. 2020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독살하는 데 실패했다. FSB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크렘린궁에 며칠이면 수도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으나 오판으로 드러났고, 서방 스파이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을 빼내 우크라이나에 전해주는 것도 막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에는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요원 약 600명이 유럽 각국의 대사관에서 추방됐고, 이 과정에서 블랙 요원(신분을 위장한 채 활동하며 발각 시 외교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스파이) 8명의 신원이 노출됐다. 지난해 6월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한 사건도 러시아 정보기관의 무능함이 드러난 일로 평가된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는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군 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FSB, SVR 등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전략적 위협을 제기하는 여러 영역에서 역량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13일(현지시간) 스페인 수사 당국 관계자들이 망명한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의 시신이 발견된 스페인 남부 베니도름 인근의 한 빌딩 지하 주차장을 수색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월 13일(현지시간) 스페인 수사 당국 관계자들이 망명한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의 시신이 발견된 스페인 남부 베니도름 인근의 한 빌딩 지하 주차장을 수색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는 정보전 역량 강화를 위해 2023년 1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세르게이 키리옌코 크렘린궁 행정실 제1부실장을 “특별 영향력 위원회” 책임자로 임명했다.

러시아 정보기관들은 유럽 지역 요원들이 대거 추방되고 활동의 제약이 커진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외국 국적을 지닌 ‘대리 요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비밀공작을 위해 정계, 경제계, 범죄조직 출신의 다양한 외국인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미군 군사기술을 러시아에 판매한 혐의로 이탈리아에서 체포된 러시아 사업가 아르템 우스를 탈출시킨 세르비아 갱단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 서방 정보장교는 FT에 “대리인들은 그들이 러시아인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리 요원’을 활용할 경우 러시아 정부의 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리 요원들은 서방 기업들의 영업 기밀을 훔치거나 컴퓨터 네트워크에 침투하는 작업도 일반 요원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다만 보안이 허술할 수 있고 현장 요원의 지시가 없으면 통제가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다.

RUSI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RU는 군 경력이 없는 요원들을 모집해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 군 경력이 없는 요원들은 서방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고 목표 국가에 침투해 현지인들을 포섭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18년 전직 GRU 요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작전을 주도했던 GRU 29155부대는 요원의 절반가량을 러시아 특수부대 스페츠나츠 출신으로 채워왔으나 최근 신입 요원들은 군 경력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GRU 54654부대는 요원들의 신원이 정부 기록에 남지 않도록 유령 회사를 통해 요원들을 선발한 다음 국방과 관계없는 정부 부처 또는 일반 기업에 배치하고 있다. GRU는 또 러시아 대학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발칸반도,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출신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요원들의 작전 수행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GRU 29155부대는 디지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장에 개인용은 물론 업무용 휴대전화도 소지하지 않고 유선전화를 활용한다.

스파이 수백명 외교관 신분 활동

러시아는 사이버전 수행 능력도 크게 강화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1월 SVR과 연계된 ‘코지 베어(Cosy Bear)’라는 이름의 해킹 그룹이 자사 내 최고위 간부들의 e메일 계정에 침투했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에 우크라이나 전력망도 해킹 공격을 받아 정전이 발생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 중립국 대사관에서는 아직도 150여명의 스파이가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유럽에서 추방된 러시아 스파이의 상당수는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스파이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다만 지금이 러시아 스파이들을 포섭할 절호의 기회라는 시각도 있다.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은 지난 1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푸틴의 철권통치가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보안 기구 내부에 “불만의 저류”가 흐르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재 영입의 기회”가 생겼다고 밝혔다. 영국 MI6 수장 리처드 무어도 지난해 7월 “오늘날 많은 러시아인이 (푸틴 체제에 대해) 조용히 경악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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