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내 강경파와 올 초부터 누적된 갈등 폭발
임시의장, 법안 처리 권한 없어 예산 처리 불투명
“이로써 하원의장직은 공석이 됐음을 선포합니다.”
스티브 워맥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아칸소)이 지난 10월 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하원 본회의장에서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표결 결과를 발표했다. 회의장 전체가 깊은 침묵에 휩싸인 가운데 한 의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이 해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 의회 234년 역사에서 하원의장 해임안 발의는 1910년과 2015년, 이번을 포함해 단 세 차례에 불과하다. 해임안 가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상치 못한 하원의장 공석으로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비롯한 의사일정이 마비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공화당 96%가 반대했지만 해임안 통과
전날 공화당 강경파 맷 게이츠 하원의원이 매카시 의장이 추진한 임시 예산안 처리에 반발해 의장 해임결의안을 제출했을 때까지만 해도 결의안이 부결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공화당 내 강경파는 극소수에 불과한 데다 민주당에서도 기권표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당 강경파 8명의 찬성표 투표에 참석한 민주당 208명 전원의 찬성표가 가세하면서 해임안은 찬성 216표, 반대 210표로 통과됐다. 공화당 의원의 96%에 해당하는 210명이 반대했지만 4%에 불과한 당내 강경파 8명의 반란표 탓에 해임안이 통과된 셈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의회의 안정을 위해 반대표를 던져달라고 요청했으나 민주당은 찬성하기로 당론을 정했다. 민주당은 매카시 의장이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 착수를 지시하고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 사건을 조사하는 하원 위원회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를 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WP는 전했다.
해임의 직접적 도화선은 지난 9월 30일 통과된 임시 예산안이다. 게이츠 의원은 해임결의안 제출 뒤 기자회견을 열어 매카시 의장이 공화당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카시 의장이 임시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등과 관련해 민주당과 ‘비밀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월 1일 “(매카시 의장과) 우크라이나에 관해 (합의를) 하나 맺었다”고 발언해 이 같은 의심에 불을 질렀다. 게이츠 의원은 앞서 지난 6월 연방정부 부채한도 상향 합의안 가결 당시에도 “우리는 매카시가 하원의장이 되면서 약속했던 근본적 약속이 위반됐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며 경고한 바 있다.
매카시 의장 해임은 올해 초부터 축적된 그와 당내 강경파 사이 갈등이 폭발한 결과다. 매카시 의장은 지난 1월 하원의장으로 선출될 당시부터 당내 강경파와 충돌했다. 그는 당내 강경파의 반대로 무려 15차례나 표결한 끝에 의장직에 올랐다. 매카시 의장은 당시 강경파의 반대를 넘어서기 위해 의원 한명이 하원의장 해임안을 단독 발의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했다. 이를 두고 강경파가 이를 활용해 의장을 축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는데, 결국 현실이 됐다. 지난해 11월 물러난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이 의장이던 시절에는 당론 또는 의원총회를 통해서만 의장 해임결의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매카시 의장에 대한 게이츠 의원의 개인적 원한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게이츠 의원은 2021년부터 성추행, 성매매 및 불법약물 복용, 선거자금 유용 등 혐의로 미 하원 윤리위원회의 조사를 받아왔는데, 게이츠는 매카시 의장이 윤리위 조사를 부추겼다고 본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게이츠 의원은 지난 10월 2일 기자들에게 “매카시 의장이 윤리위원회에 나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라고 신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나는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다. 나는 이보다 더 거친 상대들을 쓰러뜨려왔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NYT는 “(매카시 의장 해임은) 올 한 해 동안 곪아 터진 공화당 분열의 정점”이라면서 “지난 1월 매카시 의장의 의장직 취임을 막으려 했던 (공화당 내) 극우세력과 매카시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의 정점”이라고 평가했다. CNN은 “매카시는 온건파가 아니었고 공화당이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제하는 데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서 “그는 그러나 극단주의의 길에서 벗어나 국가를 (셧다운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바이든과 합의를 모색하던 순간 해임됐다”고 평가했다.
8명 대부분 ‘티파티’ 출신 프리덤 코커스
게이츠 의원을 포함해 해임결의안에 찬성한 공화당 의원 8명 대부분이 프리덤 코커스 소속이라고 알려져 있다. 뉴스위크는 8명 전원이 프리덤 코커스 소속이라고 전했다.
2015년 공화당 강경파 ‘티파티’ 의원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프리덤 코커스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고 이민, 임신중단, 성소수자 문제 등에서 극우적 입장을 취한다. 대다수는 게이츠 의원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강성 트럼프 지지자들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50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하원 전체 의석(435석)에서 공화당이 221석, 민주당이 212석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숫자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매카시 의장은 9개월 내내 이들의 입김에 흔들렸다.
매카시 의장은 해임안 가결 이후 “의원 96%의 찬성을 확보했는데도 불과 8명이 상대편과 손을 잡고 일을 못 하게 한다면 어떻게 통치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토로했다. 로라 블레싱 조지타운대학교 정부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는 공화당 하원 중 극소수가 의회와 재정에 커다란 기능 장애를 촉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임시의장으로 패트릭 맥헨리 의원(노스캐롤라이나주)이 임명됐으나 임시의장에게는 법안 처리 권한이 없어 입법 일정이 모두 중단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지난 9월 30일 통과된 임시 예산안이 만료되는 11월 17일 이후 예정된 내년도 본예산 처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매카시 의장의 해임안 통과로 기세를 올린 공화당 강경파가 정부 지출 대폭 삭감을 요구할 경우 임시 예산안에서 제외된 우크라이나 지원을 되살릴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정원식 국제부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