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기대작 중 최후의 승자는?
지난 8월 10일 개봉한 <헌트>를 끝으로 여름 극장가 한국영화 기대작이 모두 선보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에 따라 극장가가 2년여 만에 정상 운영된 터라 작품성이나 흥행에 대한 기대 또한 배가됐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각 남우주연상(송강호)과 감독상(박찬욱)을 받은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이 잇따라 개봉했다. 국내 메이저 4대 투자 배급사의 텐트폴 영화(유명 감독과 배우,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여 제작해 흥행이 보장된 상업 영화)도 모두 시장에 나왔다. 텐트폴 영화는 <외계+인> 1부를 비롯해 <한산: 용의 출현>, <비상선언>, <헌트>다.

올여름 개봉한 한국영화들은 관객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최후의 승자는 어떤 작품이 될까. 올여름 극장가 현상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한산>과 <헌트> 누가 더 잘나가나 7월 27일 개봉한 <한산: 용의 출현>(롯데엔터테인먼트)이 최종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한산: 용의 출현>은 개봉 20일 만인 8월 15일 광복절에 600만 관객을 돌파했고, 8월 17일 현재까지 누적관객수는 631만622명이다. 올여름 극장가에서 선보인 한국영화 대작 4편 중 가장 먼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10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같은 속도다. 추석 연휴까지 끌고 간다면 800만 안팎의 관객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여름 개봉한 전편 <명량>은 역대 최고 기록인 176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산: 용의 출현>은 <명량>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명량대첩 5년 전인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박해일 분)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학익진을 펼쳐 왜군을 무찌른 한산해전을 다뤘다. 280억의 순제작비를 투입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탄탄한 서사와 압도적 스케일의 스펙터클한 영상·음향 등이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이순신이라는 영웅에 더해 한산해전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에 대중이 기대를 했고, 전편 <명량>에 비해 신파성을 많이 거둬낸 점도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와 함께 영웅적 위용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전작 <명량>과 달리 <한산: 용의 출현>은 영웅서사를 해체했다”며 “이것이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인 동시에 흥행에선 전작에 비해 속도감이 떨어지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배우 이정재가 처음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한 첩보물 <헌트>(메가박스)의 선전은 놀랍다. 지난 8월 10일 개봉해 17일 현재까지 8일간 누적관객수 221만9437명을 기록했다. 안기부 요원 박평호(이정재 분)와 김정도(정우성 분)가 서로를 간첩으로 의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됐었다. 당시 외신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화려한 액션 장면들은 인상적이었으나, 플롯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했다”(할리우드 리포트), “<헌트>가 그려낸 극중 캐릭터들의 쫓고 쫓기는 역학관계는 이정재와 그의 팀이 심사숙고한 기술들로 열심히 끌고 나갔지만, 화려한 액션 신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버라이어티) 등 대체로 액션 신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를, ‘한국적 맥락’이 가미된 이야기의 난해함에 대해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반면 국내 개봉 후 쏟아진 전문가들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호의적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첩보장르에 필요한 스릴과 박력이 1980년대 상황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평가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이정재가 주연한 <오징어게임>의 후광 효과로 칸에 초청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액션 장르에 충실한 웰메이드 영화”라며 “한국 배우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첫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 사이사이에 서사의 헐거운 지점들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후반부 연거푸 터지는 폭탄과 총탄에도 좀처럼 상해를 입지도, 죽지도 않는 주인공들, 그리고 엔딩 신의 신파적 설정이 아쉽다.

<탑건: 매버릭>
<외계+인>과 <비상선언>은 울상 초대형 SF 액션 블록버스터임을 내세우며 7월 20일 개봉한 <외계+인>(CJ E&M) 1부의 성적은 참담하다. <타짜>(2006)로 568만 관객을 동원하고 <도둑들>(2012)과 <암살>(2015)로 각각 1200만 관객을 모은 최동훈 감독의 신작이기에 더욱 의외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순제작비 330억원이나 투입했지만, 누적관객수는 152만7731명. 손익분기점인 730만명에 한참 못 미친다. 200만명도 못 채운 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외계 소재의 영화를 시도하고 기술적 성취도 보인다는 호평도 있지만, 재미없고 산만하다는 혹평이 주를 이뤘다. 영화는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과 2022년 인간의 몸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사이에 시간의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8월 3일 개봉한 항공 재난영화 <비상선언>(쇼박스)의 전망도 어둡다. 개봉 후 이틀간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으나, 이후로는 한주 앞서 개봉한 <한산: 용의 출현>에 밀려나더니, 신작 <헌트>에도 추월당했다. <관상>(2013)과 <더 킹>(2017)의 한재림 감독과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영화 중반 테러범을 제압하기까지의 스토리는 탄탄하고 긴장감이 넘치지만 뒤로 갈수록 억지 신파가 극을 지루하게 만들었다는 평이 많았다. 한 마케팅 업체가 자사가 투자하지 않은 <비상선언>의 구매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 좋은 입소문을 냈다는 ‘역바이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비상선언>은 사상 초유의 항공테러로 무조건적 착륙을 선언한 비행기의 사상 초유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작비 260억원을 투입했다. 8월 17일 현재까지 누적관객수는 198만6423명이다.
티켓값 인상에 소문난 스펙터클 영화에 쏠려 내로라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총출동한 텐트폴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했음에도 코로나19 이전 여름 극장가와 비교해 1000만 관객을 훌쩍 넘는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관객이 가성비와 가심비를 따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매주 신작들이 개봉돼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되다 보니 그중 한편 정도를 골라보겠다는 심리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멀티플렉스영화관의 영화티켓 가격 인상이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극장 영화 관람료가 인상됐다. 현재 2D 영화는 성인 기준 평일 1만4000원, 주말 1만5000원이다. 특별관의 티켓 가격은 더 비싸다. 평일이라도 아이맥스(IMAX)관에서 영화를 보려면 2만1000원은 내야 한다. 4인 가족(어른 2인·청소년 2인)이 주말에 영화 한편을 같이 보고 팝콘, 음료까지 마신다면 10만원은 필요하다. 영화관이 가성비 좋은 가족 나들이 코스라는 이야기는 옛말이 됐다. 그만큼 관객들은 영화 선택에 깐깐해질 수밖에 없다. ‘입소문’이 더 중요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굳이 영화관에서 안 봐도 조금만 기다리면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티빙, 애플tv+ 등 자신이 가입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는 심리도 작동한다. 강유정씨는 “영화관을 찾을 때 기왕이면 오디오가 좋은 대형 스크린에서 봐야 영상미와 음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머리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오락영화를 우선순위로 고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 결과 국내영화로는 스펙터클한 해전 장면이 이어지는 <한산: 용의 출현>이, 외국영화로는 적의 미사일과 탑건 조종사들이 벌이는 공중전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탑건: 매버릭>(롯데엔터테인먼트)이 흥행을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톰 크루즈 주연의 <탑건: 매버릭>은 36년 전 영화 <탑건>을 보고 자란 중장년층의 향수와 ‘탑친자(탑건에 미친 사람)’라 불리며 N차 관람까지 하는 팬덤에 힘입어 8월 17일 현재까지 누적관객 775만1962명을 모았다. ‘한국영화 빅4’보다 먼저인 6월 22일 개봉했음에도 8월 18일 현재까지 영화진흥위원회 예매율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맥스, 4DX 등 특수상영 포맷의 인기도 역대급이다. 한두 작품만 엄선해 보는 관객이 많다 보니 <탑건: 매버릭>의 식지 않는 열기가 한국영화 관객을 빼앗았다는 자조 섞인 짤도 돌고 있다.
OTT로 36년 전 <탑건>을 다시 보는 시청자도 많다. OTT 통합검색 및 콘텐츠 추천 플랫폼인 키노라이츠에 따르면, <탑건>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어 7월 통합 콘텐츠 랭킹 2위(7.2~29)를 차지했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 중임에도 <탑건: 매버릭>은 8월 17일부터 OTT와 IPTV 등을 통해 국내 서비스 중이다.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재관람·밈 유행에 각본도 인기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CJ E&M)은 8월 17일 현재 누적 관객 183만명이 관람했다. 전 세계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은 걸작이지만 국내 흥행 면에선 그다지 폭발적이지 않다. 하지만 N차 재관람 열풍이 불고, 온라인에선 영화 관련 밈(meme)까지 등장했다. 배우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다는 공통점으로 <헤어질 결심>에 나온 대사에 <한산: 용의 출현> 주제를 엮어 패러디한 대사가 온라인에서 유행 중이다. “조선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마침내 왜구와 헤어질 결심”, “왜는 깊은 바다에 버려요” 식이다. 두 작품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웃으며 공감하는 댓글놀이다. 최근엔 정서경 작가의 <헤어질 결심 각본>이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영화는 해외 193개국에 선판됐다.
영화진흥위원회는 내년 초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헤어질 결심>을 선정했다고 지난 8월 11일 밝혔다. 한국영화 중에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 부문에서 수상했다.
송강호에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CJ E&M)는 국내 관객들 사이에 특별한 화제를 일으키지 못한 채 126만 관객을 모으고 스크린에서 퇴장했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