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예술로서 만화가 할 수 있는 일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익숙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 작품으로 인해 대상-대상의 재현이 맺는 관계나 언어-이미지의 관계가 재고됐으며, 회화를 보는 감상자의 시선 또한 되물어졌다. 핵심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하나에 의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갱신됐다고.

만화 「이세린 가이드」 표지 / 코난북스

<혼자를 기르는 법>(다음웹툰)으로 데뷔했던 김정연 작가의 신작 <이세린 가이드>(코난북스)도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로서 만화가 할 수 있는 일’을 갱신했다. 그 일의 목록을 다 논하기에는 훨씬 더 긴 지면이 필요하므로, 하나만 짚어보자.

<이세린 가이드>는 만화 장르를 해체하고 확장한다. 마그리트의 문장을 변주하자면, ‘이것은 요리만화가 아니’라면서 요리를 그리고, ‘전문가 만화가 아니’라면서 전문가의 삶을 그리며, ‘생활툰이 아니’라면서 생활을 그린다. 셋 모두를 하면서도 하나의 읽기 관습, 즉 장르에 귀속되지 않는다. 익숙한데도 새로운 만화를 선보이며, 익숙한 읽기와 함께 새로운 읽기를 요청한다. 결국 이 작품으로 인해 만화 장르, 만화 매체에 갱신의 틈이 열린다.

이를 이룩해내는 작품의 설정은 단순하지만 볼수록 기발하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세린은 음식 모형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음식 모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음식처럼 ‘보이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하는, 썩지 않고 먹을 수 없는, 음식의 재현물이다. 이세린은 과거 화가나 조각가가 그러했듯 재현 대상에 가장 흡사한 재현을 만들어내려 하는, 그리고 “무엇인가를 복사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궁리하는 전문가다. <이세린 가이드>는 그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필두로 해 재현 대상인 음식과 그 문화에 대한 이야기, 그런 그의 ‘한국적’ 일상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담아낸다.

아울러 이 작품은 유튜브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매체, 혹은 문자·음성매체보다 만화가 갖는 비교우위를 명확히 알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음식 모형을 만드는 과정, 실제 음식과 그 문화, 혹은 이세린의 일상에 대한 기록만이라면 영상이 더 생생하고 구체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세린 가이드>는 만화가 더 손쉽게 잘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담뿍 담아내며 그것이 만화여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바로 현재가 아닌 시간과 비현실적 상상의 재현이다.

이를테면 이세린이 태어나기 전의 과거 이야기(‘인절미빙수와 팥빙수’편)나 2075년의 미래 이야기(‘청주와 탁주’편), 혹은 이런저런 잡생각과 사후세계(‘매운 라면’편)를 영상매체로 표현하는 데는 상당한 돈과 품이 든다. 문자로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표현이 어렵다. 만화는 이런 일들을 비교적 손쉽게 저비용으로, 또 효과적으로 해낸다. 젓가락을 짧게 쥐면 가까운 곳으로 시집간다며 자신을 잠재적 며느리로 대하는 동네 어른에 대항한 세린의 우주적 상상(‘떡국과 미역국’편)은 <이세린 가이드>가 만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

만화로 본 세상

매체와 장르의 특성을 적절히 활용해 새로움을 선사하는 작품은 무척 드물다. ‘만화의 일’을 깊이 궁리해 나름의 답을 찾은 이 만화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