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의 책]<한국 문단사>

친일 문인·항일 문인 모두 우리 문학의 뿌리

반골과 불굴의 문인들은 자랑스러운 문단사다. 염상섭, 이병기, 이희승, 김광섭, 그리고 이육사와 윤동주가 있어서 항일의 화려한 광채를 발한다.

김병익 지음·문학과지성사

개인적으로 역사보다 신화에, 정사보다 야사에 눈길이 쏠린다. 사건의 배경설명을 듣는 즐거움도 있지만 누군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즐기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학사라는 본류 대신 문인들의 에피소드나 활동을 다룬 문단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국 문학평론계의 원로인 김병익의 <한국 문단사>는 대낮의 정전에 등재되지 못한 일화들을 문인 사회의 변천과 함께 조명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시대에 문인들은 지식인의 대표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전통의 탈피와 독립의 실현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됐다. 국망(國亡) 이후 국권은 조선어로 대체됐으며 작가는 겨레말을 수호하는 엘리트로 부상했다. 당대 3대 천재로 불린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가 모두 문사였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왕이 사라진 사회에서 말과 글은 예전 통치계급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면서 궁핍한 시대의 민중들을 달래주고 고무시켰다. 때문에 문학가와 그 작품에 대한 판단기준에서 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윤리적 활동도 동등한 지분을 차지하게 됐다.

문단에서 호명하는 첫 이름은 육당 최남선이다. 1908년 18세 ‘소년’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만들어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종전에 없었던 바다·소년이라는 소재를 발굴한 것은 비록 모방 시비가 있지만 첫 근대적 문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는 평가다. 육당은 부잣집 차남으로 부친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초창기 소설의 개척자인 김동인 또한 평양 대지주의 차남으로서 첫 문예지 <창조>를 펴냈다. 무엇을 하든 ‘최초’와 ‘선구’라는 영예가 따르는 게 그 무렵 문단 풍경이지만 작가들의 초창기 독립활동도 공통적이다. 나중에 변절한 점도 같지만 말이다.

3·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 만세운동과 관련해서 구속된 김동인이 있지만 정점은 춘원 이광수다.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가 춘원이라고 지적한 평론가도 있지만 조실부모한 이광수의 생애는 나라 잃은 지식인들의 생존경로를 집약했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집필한 그는 동학과 기독교, 톨스토이를 편력하다가 일왕을 받드는 신도에 빠져든다. 임시정부 기관지를 책임졌던 그는 집 안에서도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기립해서 묵념하고 젊은이에게 학병 참전을 독려하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왜 그랬을까. 김동인은 춘원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동지를 구하기 위해 일제에 협조했다고 변호한다. 민족을 위해 민족을 판다는 이 같은 억지는 일제에 부역한 수많은 친일파들이 행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애용됐다. 임시정부를 이탈하면서 내세운 민족개조론과 같은 이광수의 곡학아세는 권력에 야합하는 어용 지식인의 본보기였으며 한국 정신사의 경로굴절을 가져왔다.

이 한 권의 책

반면 반골과 불굴의 문인들은 자랑스러운 문단사다. 염상섭, 이병기, 이희승, 김광섭, 그리고 이육사와 윤동주가 있어서 항일의 화려한 광채를 발한다. 저자는 이 모든 작가들을 부인하지 말고 사랑하자고 제안한다. 전통과 역사는 아무리 더러워도 이 시대와 맞닿은 거대한 뿌리이기 때문에 넉넉히 수용하자는 뜻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