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의 아픔’ 화폭에 담아내다

민중미술 선도주자 ‘현실과 발언’ 30년 여정 회고전

암울한 군사독재 정권의 폭거가 무자비했던 1980년 10월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이 미술회관(현재 아르코미술관) 지하 전시실에서 창립전을 개최하면서 민중미술의 서막이 열린다. 그러나 당시 작품의 사회비판적 수위에 놀란 관장은 개막 직전 전시 취소를 지시한다. 김정헌 작가(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를 비롯한 참여작가 3인의 항의가 있었지만, 관장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며 단호하게 취소를 종용했다. 전시장의 전기가 차단되자 캄캄한 지하에서 개막을 위해 모여 있던 작가와 관객 20~30명은 급히 초를 사다가 촛불로 작품을 비춰가며 관람했다.

현실과 발언 30년전에 출품된 작품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민정기의 ‘풍요의 거리’, 노원희의 ‘거리에서’, 전시장 앞에서 재미있는 포즈로 사진 촬영을 한 동인들(아카이브 자료), 오윤의 ‘애비와 아들’.

다양한 실험 통해 한국미술 방향 제시
창립전이 무산된 ‘현발’측은 그날 밤 미술회관에서 전시 작품을 철수하고 대책을 모색하던 중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동산방 화랑 박주환 사장의 도움으로 동산방 1, 2층으로 옮겨 ‘현발’ 창립전을 열게 됐다. 촛불을 켜고 시대의 어둠을 밝혔던 이들은 1980년 창립 전시 이래 10여년간 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1990년 해체선언을 하고, ‘현발’에 참여했던 작가와 이론가들은 각자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을 전개해왔다.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이들의 30년 여정을 정리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창립전에 참여했던 김정헌·민정기·성완경·심정수·윤범모·임옥상과 이후 합류한 강요배·박불똥·박재동·안규철 등 20명의 작가들이 당시 작품과 최근작 200여점을 걸었다. 참여작가들을 중심으로 지난해 ‘현실과 발언 3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홍지석·김준기·김종길·김지연·이대범 등 젊은 큐레이터 5명이 기획자로 참여해 10여 차례 콜로키움을 거치면서 1년여에 걸쳐 준비됐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발’ 동인들의 활동이 주목받는 것은 민중미술의 선도 주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 때문이다. 김지연 큐레이터는 “‘현발’의 작품은 무조건 민중미술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한 편인데, 참여 작가들의 초기작과 이후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서 매우 폭넓은 관심을 갖고 개성적인 작품활동을 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요배 작가의 경우 ‘현발’ 시절에는 주로 민중 인물화를 그렸으나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면서 이웃과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또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풍경, 역사로 소재를 넓혀 나갔다. 민정기 작가도 소시민의 일상적 삶의 편린을 그리다가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한 뒤 지역과 사람들의 터전을 살펴보면서 풍경화로 옮겨갔다. 매우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 이적표현물 유포죄로 구속되기까지 했던 임옥상 작가는 이후 공공미술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박불똥 작가 역시 ‘현발’이 10년간 6차례의 전시를 할 때마다 늘 검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던 ‘위험인물’이었다. 주재환 작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사회에 대한 진지한 농담을 던지는 재치있는 작가로 통한다. 이태호·성완경 작가는 ‘현발’ 시절에는 직접 작업을 했으나 이후로는 평론 쪽으로 전환했다.

이번에 참여한 20명의 작품은 ‘새로운 매체의 실험과 확장’, ‘개념+예술+행동’, ‘비판적 현실과 신구상’, ‘삶의 풍경’이란 주제로 나뉘어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각 층별로 전시됐다.

‘새로운 매체의 실험과 확장’은 1980년대에 사진이나 만화, 만평, 포스터 등 새로운 매체들의 가능성을 탐색했던 작품들로서 성완경, 김용태, 박재동, 박세형, 정동석의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새로운 매체로부터 기존의 미술 매체나 형식을 대체할 대안을 찾고자 했으며, 이런 매체 실험은 해체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돼 왔다.

‘개념+예술+행동’은 개념예술에서 출발해서 예술행동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주재환, 임옥상, 이태호, 안규철, 박불똥의 작업은 감상 대상으로서의 예술을 넘어서 참여와 개입을 통해 관객,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매개로 진화시켜 나간다. 이들의 작업은 공공미술 개념을 넘어서 행동주의 경향을 보인다.

일찍 세상 떠난 동인들 유작전도
‘비판적 현실과 신구상’의 경우 ‘현발 동인 제1선언문’에 나왔던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란 슬로건을 내세운다. 이들은 "기존 미술이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다"고 비판하면서 ‘비판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신구상 회화를 등장시켰다. 이런 경향은 김건희, 김정헌, 신경호, 심정수의 작품에 남아있다.

지난 7월 28일 열린 개막행사에서 ‘현발’의 활동에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패 증정식이 열렸다.

‘삶의 풍경’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들을 소개한다. 강요배, 노원희, 민정기, 손장섭, 이청운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일상이 모여서 형성되는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 그 삶이 펼쳐지는 터전,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나간다.

작품 전시 이외에 ‘현발’ 동인들 가운데 일찍 세상을 떠난 ‘백수남·오윤 유작전’, 그리고 ‘현발’ 창립전을 재현한 전시와 ‘현발’ 관련 자료로 구성된 ‘현실과 발언 아카이브전’이 3개층(4~6층)에 걸쳐 열리고 있다. ‘현발’의 민중미술 경향을 대표하는 목판화가 오윤 작가(1946~1986)의 전집이 이번 30주년 기념전을 계기로 발간된다.

지난 7월 28일 열린 개막전은 1980년 ‘현발’의 출발 당시 작가들이 가졌던 긴장감을 회고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냈다. 창립전 재현을 비롯한 주제별 전시에 출품한 초기작들은 작가들이 30년간 소중하게 보관해온 손때 묻은 작품들이라서 감동을 더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정헌 작가는 “창립전 이후 5~6년 간격으로 제작한 작품 4점을 전시장에 걸어놓고 보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며 “‘현발’ 활동 시기에는 은유가 강하면 대중에게서 멀어질 것 같아 시대를 비유와 상징들로 강하게 표현했다”고 회고했다. 또 ‘현발’ 활동 시기에 일간지 미술기자로 일했던 손철주 학고재 주간은 “참여 작가들이 이후에도 각자 풍성한 작품세계를 일궈왔기 때문에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현재성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현발’ 활동에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패 증정 순서도 있었다. 창립전을 열게 해준 박주환 동산방 사장, 대표적인 민중미술 컬렉터로 자신의 컬렉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고 조재진 영창제지 사장, 미술평론가 김윤수·유홍준씨,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사장, 우찬규 학고재 사장 등이 대상이었다.

제도화된 미술계의 과도한 침묵에 회의를 지닌 ‘현발’은 비현실적 미술언어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에너지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런 ‘현실과 발언’의 행보는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대적 비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그려냈던 그들의 여정은 시간이 흐른 과거의 무용담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현실의 난관을 헤쳐 나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로서 곱씹어 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왕진오 <월간 아트웨이브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