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영화]‘악마’는 실제 모습을 드러냈을까

<셉템버 이슈>

미로비전

그녀는 살아 있는 신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구축한 왕국을 마음껏 휘젓는 독재자다. “‘블랙’은 안돼”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패션산업이 휘청거린다. 알마니도 베르사체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 백화점 명품관 눈요깃거리일 ‘장 폴 고티에’도 그녀 앞에서는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사관계자도 아니라,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그 자신이 말이다!

2006년에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감독 데이비드 프랭클)가 개봉했을 때 영화가 말하는 ‘악마’ 또는 ‘암캐(bitch)’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대부분 알아차렸다. 안나 윈투어. 1988년 이래 패션잡지 <보그>를 편집장으로서 20년째 이끌고 있는 여자다. 영화 <셉템버 이슈>를 한글로 번역하면 ‘9월호’쯤이 될 게다. 영화는 실제 <보그> 9월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편집장 윈투어를 따라가며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악마는…>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분한 ‘악마’ 미랜더 프리스틀리는 “(옷들이) 다 똑같아 보인다”는 여주인공의 말에 스며 있는 스노비즘을 날카롭게 끄집어내어 쏘아붙인다. 기억나는 그녀의 대사를 옮기면 대충 이렇다. “너는 그냥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골라 입는다는 게 그 미련하게 보이는 파란색 스웨터였어. 그건 ‘나는 옷 따위는 신경 쓸 틈이 없는 진지한 인간’이라고 세상에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그 ‘블루’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알아?” 파란색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며 시작한 그녀의 말은 파란색에 관한 패션의 역사를 나열한 뒤 파란색이 수많은 일자리와 재화를 창출했다고 결론을 맺는다. 물론 여주인공은 압도된 채 할 말을 잃는다.

실제의 윈투어는 어떨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말 한마디와 표정의 미묘한 변화에 노심초사다. 그러나 윈투어는 <악마는…>를 본 관객들이 기대할 만한 ‘애드립’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게 ‘윈투어의 실제 모습’이라고 내놓는다. 하지만 과연 그게 실제 모습일까. 그녀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자신의 직업을 재미있어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다. 그 직후 그녀는 다소 무거워 보이는 핸드백을 직접 손으로 들고 나간다. 산더미 같은 옷과 핸드백을 영화의 주인공인 어시스트에게 내던지는 <악마는…>의 ‘악마’를 의식한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얼음여왕’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여성의 캐릭터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곳에서 철저히 계산된다. 영화 속 그녀는 이성적이지만 또한 매우 사교적이다. 진실은 카메라 밖에 있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다시 진실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당기기 위한 <셉템버 이슈>의 전략은 윈투어 주변인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영화의 상당 분량은 <보그>의 실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그레이스 코딩턴에 맞춰진다. 잡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이는 윈투어의 냉혹한 결정에 코딩턴은 수없이 좌절을 경험한다. 때때로 카메라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그녀의 모습을 비춘다. <악마는…>의 여주인공은 패션계를 떠나 ‘제2의 인생’이라도 선택할 수 있었지만 1941년생인 이 여자(코딩턴)는 “일을 그만두면 갈 곳이 이제는 없다”고 카메라 앞에서 중얼거린다. 영화에 따르면 코딩턴 역시 ‘한때’는 잘나가는 패션 모델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패션 모델 일은 그만두었고, 유명 사진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패션사진 에디터의 경력을 쌓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용감하면서 동시에 지혜롭다. 독재자 편집장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대담성도 보인다.

어쨌든 이건 2007년의 일이다.<셉템버 이슈>에서 <보그>지 에디터와 출판사 관계자들은 840쪽 분량의 역대 최대 실적을 두고 자축파티를 연다. 2009년의 경제 위기는 <보그>도 봐주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 선타임스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2009년 <보그>의 ‘셉템버 이슈’는 600쪽을 간신히 넘길 정도로 얇아졌다고 한다.

요즘 이 영화

2010년 1월 28일 개봉. 전체 관람가.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