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민참여 확대, 정부 신뢰 높이고 민주주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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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 라스크·신복용 헬싱키대 연구진·페르투 얌센 시트라 스페셜리스트 인터뷰

페르투 얌센 핀란드 혁신펀드 스페셜리스트와 미코 라스크 헬싱키대 소비자사회연구센터 교수, 신복용 소비자사회연구센터 박사후연구원(왼쪽부터)이 3월 29일 서울 광화문 주한핀란드대사관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디지털 시민참여’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페르투 얌센 핀란드 혁신펀드 스페셜리스트와 미코 라스크 헬싱키대 소비자사회연구센터 교수, 신복용 소비자사회연구센터 박사후연구원(왼쪽부터)이 3월 29일 서울 광화문 주한핀란드대사관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디지털 시민참여’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핀란드와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사한 점이 많아요. 지정학적으로 러시아를 포함한 강대국과 인접해 있고, 비교적 최근에 독립해 국가적인 정체성과 민족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와 교육, 국가적 연구개발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 보급률과 디지털 리터러시(문해력)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죠. 하지만 핀란드는 한국과 비교해 정부에 대한 신뢰, 부패지수, 정부 혁신, 언론 신뢰도, 행복지수 등 민주주의와 관련된 여러 측면에서 앞서 있어서 우리가 배울 부분이 있습니다.” 지난 3월 29일 서울 광화문 핀란드대사관에서 만난 신복용 헬싱키대학 소비자사회연구소(Centre for Consumer Society Research) 박사후연구원은 디지털 시민참여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핀란드는 유엔이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올해까지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지난 3월 발표된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5계단 상승한 52위였다.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양국 행복지수의 격차를 만든 주요 요인 중 하나라는 분석이 나온다. 핀란드는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책의 성과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보 공개에 적극적이다. 일례로 핀란드 헬싱키 시정부는 선출직 공무원의 공약 이행 상황을 시 홈페이지에 백분율로 표시하고 변동이 있을 때마다 업데이트한다.

이날 신 연구원과 함께 만난 미코 라스크 헬싱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 페르투 얌센 핀란드 혁신펀드(Sitra) 스페셜리스트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시민참여의 확대가 정부의 신뢰성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약 보름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이들은 경기 수원시의 ‘새빛톡톡’, 서울시의 엡보팅(M-Voting) 같은 디지털 참여 서비스의 성과를 측정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경기연구원과 공동 연구 협약도 맺었다.

도시의 민주주의 비교 평가, 선의의 경쟁 기대

소비자사회연구센터는 기후 대응을 정부 정책의 주류로 만드는 방안, 데이터 기반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 등을 연구했다. 정치학자, 인류학자, 인공지능 연구원 등이 함께하는 이 연구소에서 최근 주력하는 분야는 디지털 시민참여다. 빅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둔 ‘코크리에이션 레이더(Co-Creation Radar)’라는 이름의 디지털 시민참여 평가 도구를 개발해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예테보리를 비롯해 유럽 내 여러 시 정부와 협력해 실증하고 있다.

시민의 정책 제안이나 민원 등 시민이 행정에 참여해 만들어지는 데이터의 양은 많은데, 대부분은 방치된다. 연구진은 이런 공개데이터를 활용해 시민참여의 민주적 측면을 측정하는 지표를 개발했다. 동향 분석과 시각적 분석, 자연어 처리 등을 이용한 내용 분석 혹은 기계학습을 통한 예측 모델 등으로 기존에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양의 시민참여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국가보다 도시에서 이뤄지는 활동에 집중했다.

라스크 교수는 “시민의 민주주의 참여를 고취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도시의 민주주의 품질과 관련한 성과를 평가할 방법을 고민하며 만든 도구”라며 “시민의 정책에 대한 평가나 참여예산제도(시민이 예산편성에 직접 참여해 재정 운영의 투명성, 재원 배분의 공정성을 높이는 제도)가 도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 도시의 민주주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빅데이터·기계학습 분야를 연구하는 신 연구원은 “도시 내에서도 어떤 지역에서 시민의 소통이나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런 소통·참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무원은 시민의 정책 욕구를 빠르게 파악하고, 필요한 정책을 인공지능의 추천을 받아 도입할 수 있다. 정책 도입의 영향을 평가할 때도 유용하다. 라스크 교수는 “헬싱키시는 시민의 피드백을 연간 1만8000건 정도 받는데, 이 피드백 데이터가 쌓이면 방대해진다. AI를 이용하면 시민의 수요가 어디서 나오는지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다만 이 알고리즘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동 개발해 개방성과 투명성을 갖추게 하고, 특정 집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마다 겪는 문제가 다르므로 거시적 지표 외에도 해당 도시와 협업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한 지표를 개발한다. “도시가 뒤처진 부분을 가려내고, 민주적 참여를 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주는 최초의 도구”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 평가 도구가 전 세계 많은 도시에 확산하면, 국제적 비교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다. 라스크 교수는 “도시의 민주적 참여를 제대로 평가하고, 다른 국가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경쟁, 민주적 참여를 향한 선의의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시민 참여예산제, 도시 전체 재정으로 확대 실험

서울시의 올해 시민참여예산은 500억원이다. 시 전체 예산(45조원)의 0.109%다. 핀란드도 상황은 비슷한데, 최근 핀란드 혁신펀드는 참여예산의 범위를 도시 전체 재정으로 확대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얌센 스페셜리스트는 “시민 패널이 도시나 지역에 필요한 사업을 숙의 민주주의 형태로 논의해 도시의 재정 기획에 더 넓은 형태로 참여하게 된다”면서 “물론 이런 실험으로 대의제를 우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책 결정자들이 일할 때 시민들의 의견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길 원한다”고 말했다.

OECD는 2021년 발표한 ‘핀란드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의 원동력’이라는 이름의 보고서에서 ‘핀란드 역설’을 언급했다. 정치인·행정기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참여해 정치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는 ‘효능감’은 낮은 수준에 있다는 뜻이다. 참여예산의 확대는 시민의 정치 효능감을 높일 수 있다. 얌센은 “(국제적으론 높지만) 시민의 공무원에 대한 신뢰가 낮고, 공무원은 시민들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양방향으로 신뢰가 낮은 상황인데 이 프로젝트는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선출직 지자체장과 공무원, 시민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 3월 7일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연례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가 28위에서 47위로 하락했고,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시민참여가 이런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 데 도움이 될까. 라스크 교수는 “핀란드에서도 NGO나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시민의 수로 보면 시민의 정치활동이 줄어들고 있다. 이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민주적 경험이 참여의 동기가 돼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뢰와 뗄 수 없고, 정치 참여로 신뢰도를 높이면 정책을 실행하기 쉽고, 시민의 저항도 줄일 수 있다. 결국 거시적 차원에서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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