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수사로 다 했으니 조사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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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재발 방지 목적부터 달라…특별법 수용,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은 정황도

정부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의결한 지난 1월 30일 이정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서울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실 말고 필요 없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성동훈 기자

정부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의결한 지난 1월 30일 이정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서울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실 말고 필요 없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진정으로 유가족과 피해자 그리고 우리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발 방지에 기여할 수 있는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정부도 적극 수용할 것입니다.”

정부는 끝내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거부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1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이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의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법안의 내용이 달랐다면 정부 입장도 달랐을 거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법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된 이래 한결같았다. 정부는 어떤 조건이 충족된다면 특별법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전제도 달지 않았다. 특별법안은 지난해 6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처음 상정됐다. 다음은 국회 회의록이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십니까?

한창섭 행정안전부 장관 직무대행: 예. 기본적으로는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당인 국민의힘의 반대로 법안은 패스트트랙 절차에 따라 안건조정위원회에서 다뤄졌다. 지난해 8월 열린 회의에서도 정부 입장은 동일했다.

이한경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 정부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특별법이) 일단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법안을 논의하는 단계였기에 정부가 원하는 특별법의 방향이 있었다면 이를 반영시킬 여지도 있었다. 정부의 입장은 그러나 덮어놓고 반대였다. ‘진정한 특별법이라면 정부도 수용할 것’이라는 얘기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특별법안은 참사의 원인과 후속조치 등을 조사할 특별조사위원회(조사위)의 구성을 골자로 한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과 피해자 지원 등도 담았다.

윤석열 정부는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5가지 이유를 댔다. ①특별조사위원회의 강력한 권한이 헌법에 위배된다 ②특조위 구성에 있어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았다 ③특조위 업무 범위가 광범위해 사법부와 행정부 영역을 침해한다 ④진상규명은 정상적으로 진행돼 왔다 ⑤예산이 낭비된다 등이다. 이 주장들이 얼마나 타당한지 짚어봤다.

진상규명 어디까지 이뤄졌나?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지난 1월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안에 대한 국회 재의 요구,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지난 1월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안에 대한 국회 재의 요구,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정부는 경·검 수사를 통해 충분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본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은 지난 1월 30일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500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 사건을 면밀히 수사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했습니다. 검찰 보강 수사를 통해 서울경찰청장을 포함한 23명이 기소됐고, 그중 6명이 구속됐습니다”라고 했다.

수사가 이뤄졌으니 더 이상의 조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다. 수사와 조사는 그러나 그 목적부터 다른 행위다. 수사는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책임자의 고의나 과실이 참사의 원인이 됐다는 점이 법적으로 입증돼야 처벌이 이뤄진다. 때문에 수사는 개인의 행위에 집중할 뿐 아니라 입증 가능한 잘못만 다룰 가능성이 높다. 반면 조사는 처벌보다는 유사 사고의 재발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인의 책임보다는 조직과 제도 운용상의 문제를 살피는 데 초점을 둔다.

조사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진상규명은 결코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이태원 참사 당시 경찰 대응만 놓고 보자. 경찰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안전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참사 당일의 대응이다. 참사가 일어나기 약 3시간 40분 전부터 압사 위험을 알리는 신고가 잇따라 접수됐지만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다. 도심 한복판에서 세 자릿수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도 경찰 지휘부는 사고 발생 후 1~2시간이 지난 뒤에야 참사를 인지했다. 경찰 조직의 대응을 두고 ‘왜?’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수사 결과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답변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태원 참사 관련 안전사고 예방조치를 소홀히 하거나 참사 당일 조치 미흡(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기소된 경찰은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을 포함해 모두 8명이다. 이들 8명의 과실이 없었다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수사기록 등을 보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오히려 사고의 원인은 경찰 조직의 관행이나 업무 우선순위 등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안전사고에 대비한 축제 인파 통제는 경찰 업무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진호 전 용산서 정보과장은 참사 직전 ‘인파 밀집 위험이 있으니 핼러윈 때 이태원에 가보겠다’는 부하직원에게 “주말이고 하니까 집회에 총력 대응해야 한다. 정보관이 축제에 나가서 할 게 뭐 있나”라고 했다. 용산으로 대통령실이 이전되면서 용산경찰서가 집회 대응에 집중해야 했던 상황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경찰은 시민들의 압사 위험 신고에 관성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참사 당일 가장 위급한 상황임을 의미하는 ‘코드 제로’ 신고가 잇따랐지만 서울청과 용산서의 상황실은 이를 주의 깊게 보거나 전파하지 않았다. 김광호 전 서울청장은 2022년 국회 국정조사에서 “코드 제로가 (하루) 100여 건에 이른다. 접수요원이 살펴보라고 하지 않는 한, 상황팀장이 자체적으로 확인하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참사의 원인 파악에 실패하면 재발 방지 대책도 빗나갈 수밖에 없다. 경찰청은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 ‘경찰 대혁신 태스크포스’를 꾸려 약 1년 만에 개선책을 내놨다. 일정 장소에서 1시간 내 3회 이상 신고가 접수되면 선제 대응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중요 상황 발생 시 지휘관 휴대전화로 정보가 자동 전파되는 앱을 개발했다. 지휘관에게 상황을 보고할 체계가 없어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 아닌데도, 손쉬운 기술적 해법을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참사 당일 서울청장과 용산서장은 집무실과 관용차량의 무전기를 통해 경찰 내 모든 무전을 들을 수 있었다. 무전에는 비명도 포함돼 있었지만 용산서장은 듣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달랐던 각국의 사후 대응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 경찰 과학수사대가 현장 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 경찰 과학수사대가 현장 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태원 참사 직후 언론은 주최자 없이도 핼러윈 축제가 안전하게 진행된 각국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홍콩 최대 번화가 란콰이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홍콩 경찰은 경사진 골목과 계단이 많은 란콰이퐁에 인파가 몰리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적극적으로 안전관리에 나선다. 이동하는 시민들과 함께 걸으며 일방통행을 유도하는 식이다. 경찰이 대열에 들어가 있기에 자연스럽게 공간을 확보하고 동선과 이동 속도 등을 조절할 수 있다. 홍콩 경찰도 처음부터 인파 안전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 아니다. 1993년 발생한 란콰이퐁 참사가 계기가 됐다. 그해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행사에 란콰이퐁에만 1만5000명의 인파가 몰렸고, 21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을 당하는 군중 압착 사고가 발생했다. 그 이후 당국의 대응이 주효했다. 홍콩 당국은 ‘법원의 양심’이라 불리던 케말 보카리 판사에게 사고 조사를 맡겼다. 조사위원회는 군중 관리에 대한 홍콩 경찰의 태도 변화를 주문하는 등 10가지 권고안을 내놨다. 이 권고안에 따라 이후 대규모 인파 밀집 행사 시 경찰에게 엄격한 군중 관리 의무를 부여했다.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발생한 군중 압착 사고는 이태원 참사와 여러모로 닮았다. 그해 7월 열린 아카시시 불꽃놀이 행사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사고는 기차역과 불꽃놀이 회장을 잇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보도교에서 발생했다. 11명이 사망하고 183명이 다쳤다. 사망자 중 9명은 10세 미만 아동이었고, 2명은 70대 노인이었다. 지자체가 주최한 행사였지만 안전관리는 민간 경비업체가 담당했다. 경찰도 배치됐는데 당시 축제 때마다 기승을 부리던 폭주족 대응에 290여명이 배치됐고, 인파 관리에는 30명 안팎이 배치됐다. 행사장을 통제하던 경비업체 관계자들은 사고 발생 몇 시간 전부터 인파 밀집 위험을 파악하고 경찰을 다리 위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좀더 두고 보자”, “폭력 상황은 없다”며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경찰이 사전에 위험 요소를 알고 있었다는 점, 업무 우선순위에서 인파 관리가 뒷전으로 밀려 적극적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이태원 참사와 닮았다.

사후 대응은 달랐다. 책임자 처벌을 위한 수사와 별개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가 사고 발생 10여 일 만에 꾸려졌다. 6개월 만에 나온 보고서는 경찰 조직의 대응 소홀을 지적하는 등 18가지 권고사항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찰이 인파 밀집 경비에 대해서는 주최 측 경비업체에 맡기고, 군중 사고의 억제는 당초부터 경찰 업무에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순히 아카시경찰서의 담당자 혹은 아카시경찰서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효고현경찰청 전체의 방침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인파 밀집 사고 위험이 있을 때 ‘대응할 수 있다’고 규정한 기존의 법 조항을 ‘대응해야 한다’는 강행 규정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개인의 잘못보다는 조직의 구조에 집중한 것이다. 특기할 사항은 조사위가 주최 측이 존재하는 행사라도 인파 밀집 사고 관리에 경찰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는 점이다. 사복을 입은 민간 경비업체 관계자들만으로는 인파 통제에 강제력을 갖기 어려우니, 제복을 입은 경찰이 인파 관리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봤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태원 참사 뒤 내놓은 ‘국가 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에서 앞으로 주최 측이 없는 축제·행사에 대한 안전관리계획 수립을 지자체에 맡기기로 했다. 이태원 참사에서 정부와 경찰의 대응 실패를 참사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탓에 지자체의 책임 확대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귀결된 셈이다. 이 역시 사고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결과라 볼 수 있다.

제도와 관행이 다른 각국의 사례는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한국의 실정에 바로 대입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형 참사에서 수사 이외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방향성은 일관되게 읽힌다. 2010년 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독일의 러브 퍼레이드 군중 압착 사고는 사고 이후 책임자 처벌을 위한 수사가 이뤄졌지만, 공소시효 만료의 압박 속에 책임자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 또 다른 참사로 끝났다. 사고 발생 12년 만인 2022년에 와서야 주 법무부 장관 주도로 대형 참사 조사에 대한 개선 방안이 나왔다. 이 방안 중에는 형사 절차의 제한 없이 사고의 모든 배경 정보와 원인을 규명할 별도의 조사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무소불위 특조위?

정부는 특별법안이 조사위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해 헌법 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법안에 따르면 조사위는 결정적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요구에 2번 응하지 않으면 조사위 의결로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고, 자료 제출 요구를 2회 이상 거부하면 검찰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할 것을 의뢰할 수 있다. 정부는 이 같은 권한 부여가 과도하다고 본다. 이 권한은 그러나 조사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앞서 활동했던 세월호 특조위와 사회적참사특조위(사참위)에도 부여됐다. 조사위가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의뢰한다 하더라도, 영장을 청구할지에 대한 판단은 종전대로 검찰·공수처 등 수사기관이 하고, 영장의 발부 여부는 법원이 심사한다. 게다가 조사위가 특별검사(특검) 임명을 국회에 요구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은 여당의 반대로 최종안에서 빠졌다. 세월호 특조위와 사참위에는 부여됐던 권한이다.

정부는 조사위 구성 방식도 편향적이라고 본다. 법안은 국회의장이 관련 단체와 협의해 3명의 조사위원을 추천하고, 여야 교섭단체가 각각 4명씩 추천해 모두 11명의 조사위원을 임명하도록 했다. 정부는 더불어민주당 출신 국회의장이 위원을 추천하는 점, 국회의장과 위원 추천권을 협의하도록 한 관련 단체가 특정 정치 성향을 가질 수 있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당초 원안은 유가족단체에 3명 위원의 추천권을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여당이 반대해 국회의장이 협의를 통해 추천하도록 한 터였다. 결과적으로 정부·여당은 유가족단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고 본 셈이다.

정부는 조사위의 업무를 규정한 법 조항에 ‘책임소재 규명’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을 두고는 “법적 책임소재를 결정하는 사법부의 고유한 역할과 권한을 침해할 소지가 높다”며 반대했다. 조사위 업무는 법적 책임을 따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 뿐더러, 설령 범죄혐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수사기관에 고발하거나 수사를 요청하는 데 그친다. 조사위가 법적 책임소재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정부가 수사와 조사의 개념을 여전히 혼동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오독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국가 예산의 낭비도 반대의 논거로 들었다. 정부는 조사위가 구성되면 2년 동안 96억원의 예산이 소요된다는 2023년 6월 국회예산정책처의 추계를 인용했다. 예산 낭비라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의문이지만, 실제 예산 소요는 96억원보다 적을 가능성이 높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추계를 내놓았을 때와 달리 최종안에서는 조사위원의 수가 17명에서 11명으로 줄었고, 조사위 활동 기간은 2년에서 최장 1년 3개월로 단축됐다.

진상규명이라는 당연한 요구를 어떻게 정부가 반대할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조사 과정, 지난한 과정이었음에도 한계가 있었던 조사의 결과물, 이를 지켜보았던 공동체의 트라우마는 정부가 ‘덮어놓고 반대’로 입장을 정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이 의결된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권선동 국민의힘 의원은 “국회가 세월호참사 특별법을 만들어 가지고 몇 번 조사했습니까? 아홉 번에 걸쳐서 국정조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특검 수사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진상이 밝혀진 게 있었습니까? 오히려 사회적인 갈등과 불신만 증폭시켜 왔습니다”라고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월호 참사 조사위원회 활동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부가 또 다른 참사의 원인 규명을 거부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계를 보완하고 극복해 더 나은 원인 규명 조사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의 책임을 인격화해 소수의 책임자를 찾아내 행위 이상의 책임을 묻는 현재의 방식보다, 구조적 원인을 찾는 조사가 공동체는 물론 사회의 갈등관리에 보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세월호 특조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던 재난사회학자 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는 자신의 책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에서 “5·18 광주항쟁의 발포 명령자를 찾듯이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키거나 승객들을 구조하지 말라고 명령한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법적 관점에 압도당하지 않고 구조적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피해자와 대중의 책임 배분 요구를 적절히 소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의 잘못과 부주의 무능으로 발생한 재난의 책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가 진척되지 않는다면, 책임의 인격화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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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