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봉사단 본부와 한국 정부의 1순위 ‘온도차’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로 알려졌지만, 영어교사뿐만 아니라 보건 요원도 있었다. ‘평화봉사단=영어교사’라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보건 요원을 맡았던 단원들은 종종 아쉬움을 나타냈다. 미 평화봉사단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200여명의 영어교사와 500여명의 보건 요원을 파견했다. 이들은 지방의 군청이나 면 소재지 보건소에서 결핵, 가족계획, 모자보건, 한센병 관리 등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60년대 한국은 급속한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보건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농촌에서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무의촌 문제가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위생과 전염병이 골칫거리였다. 미 평화봉사단 본부에서는 평화봉사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한국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의 보건 문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보건 프로그램을 1순위로 두고, 영어 교육을 2순위로 뒀던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영어 교육이 훨씬 시급하다고 판단해 더 많은 인원의 영어교사를 요청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영어가 고픈(English-hungry)’ 나라였기 때문이다.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
미 평화봉사단은 보건 프로그램(The Health Program)을 기획하면서 농촌에 방점을 둔 목표를 구상했다. 한국의 농촌지역에서 공중보건 여건과 전달체계를 개선하고 가족계획을 돕는 일을 구체적인 목표로 정했다. 보건에 관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평화봉사단은 그러나 전문가나 고문을 파견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중간 수준(mid-level manpower)의 봉사단원을 파견할 뿐이었다. 당시 평화봉사단에 지원한 사람들은 대개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었다. 평균 나이 23세였으며, 인문사회 전공자가 가장 많았다. 그나마 보건 프로그램의 봉사단원들은 영어교사와 마찬가지로 3개월간 합숙훈련을 받았지만, 실습이 더 많이 배정되는 등 좀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이를테면 결핵 피부 반응 검사, 객담 검사 후 현미경을 이용한 결핵균 진단, 결핵을 예방하는 BCG 접종, 위생 관리 방법 등을 사전 훈련에서 배웠다. 그렇다고 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보건 요원들이 3개월의 훈련으로 의료인이 될 수는 없었다. 농촌의 일반인들보다 좀더 나은 수준의 의료 지식을 갖추긴 했지만, 간단한 소독이나 드레싱 처치, 피하주사 등이 가능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너 몇 기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소식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국에서 평화봉사단끼리 만났을 때 ‘What’s your number?’라며 다짜고짜 숫자(number)부터 물어보지 맙시다. 아주 나쁜 버릇입니다.” 여기서 숫자란 기수(K-1부터 K-51까지)를 말한다. 마치 해병대 출신들 사이에서 기수를 묻는 것처럼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이에서도 “너 몇 기야?”라며 기수부터 묻는 관행이 생겨나고 있었다. 소식지에서는 기수로 선배, 후배의 위계를 나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기실 K-1부터 K-51까지 기수를 통해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은 파견 시기와 분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략의 나이까지 유추 가능했다. 따라서 기수는 봉사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상대가 영어교사인지, 보건 요원인지도 기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K-1부터 K-3까지는 영어교사였으며, K-4와 K-6는 보건 요원이었다.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라는 같은 단체 하에 있었지만 훈련지, 훈련내용, 근무지 등이 모두 달랐기에 평소에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영어교사는 주로 도시에 배치됐지만 보건 요원은 무의촌인 농촌 지역에 주로 배치됐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과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면 영어교사와 보건 요원은 한국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다른 정서가 있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매료된 나머지 한국에 정착해 40~50년을 살았던 단원들은 대개 보건 요원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강원도 강릉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출신의 밥 그라프(Bob Graff)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보건 요원으로 근무한 뒤 미국에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삼일회계법인으로 이직했다. 그 이후 한국에 귀화했다. 은퇴 후 지금은 강릉에 거주하고 있다. 그라프씨는 미국에서 거주한 세월보다 한국에서 거주한 세월이 훨씬 길다. 법적으로도 한국인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어 선생들은 어쨌든 선생이니까 대접을 받았어요. 어딜 가나 선생님, 선생님이었지요. 그 당시 한국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더 그랬죠. 그리고 선생님한테 다들 영어를 배우기를 원했죠. 그래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선생님이 영어를 사용하기를 원했지, 한국말을 하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보건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국말을 써야 했습니다. 영광군 보건소에 오는 사람 중에 누가 제대로 영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말 매뉴얼을 만들어 문진 때 쓰는 표현부터 시작해 아예 달달 외웠어요. 문진하고 나면 또 이들이 얘기하는 증상 등을 받아적어야 하니까. 비유하자면 영어 선생들이 양반 대접받을 때, 우리는 상놈 대접받았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객담(가래)이나 받으러 다니는 일꾼이었던 거죠. 그쪽은 양반, 우리는 상놈.”
경쟁업체는 무당
그라프씨의 구술대로 보건 요원들은 훨씬 생활 밀착적이었다. 이들은 보건 서비스 인프라 및 전달 체계 개선을 위해 직접 가정 방문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농어촌 지역에선 보건소 방문 자체가 워낙 큰일이었던 까닭이다. 보건 요원들은 완행버스를 타고 집마다 방문했다.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에서 인형극, 퀴즈쇼 형식으로 보건교육을 하기도 했다.
보건 요원들은 구급낭에 약을 가지고 다니며 관리 환자에게 약을 배포했고, 정기적으로 환자를 확인했다. 이런 활동을 한 보건 요원들의 경쟁자는 바로 무당이었다.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농어촌 지역 주민들은 환자에게 진료 대신 굿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봉사단원들은 무당과 굿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건 요원이 아닌 영어교사 중에서도 이 굿을 눈여겨본 단원이 있었다. 1971~1972년에 한국에 거주한 로렐 켄달(Laurel Kendall)은 다른 봉사단원들과 함께 굿을 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소식지 ‘Noodle’(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소식지 ‘여보세요’는 1972년 제호를 바꾸었다)의 편집자로서 그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K-16 단원인 데니스 할핀(Dennis Halpin)이 쓴 ‘서울 샤머니즘’(1972년 7월 ‘Noodle’ 2권 2호 수록)이라는 원고를 검토했다. 훗날 켄달은 인류학자로서 한국의 무속을 연구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당, 여성, 신령들 -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의례적 실천>(원제: Shamans, Housewives, and Other Restless Spirits)이라는 책을 1987년 7월에 출판(University of Hawaii Press; 1st edition)하기도 했다.
보건 요원의 원조, K-4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에 대한 설명은 첫 기수인 K-4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K-4의 훈련은 미국의 보건교육후생성(US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및 공중보건서비스국의 ‘인디언 건강과(Division of Indian Helath)’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한국에 파견할 보건 요원들은 주로 결핵 관리 업무를 담당하게 될 터였다. 문제는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결핵이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기에 실습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에선 이례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과 대가족 생활로 인해 인디언들 중에 결핵환자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인디언보호구역을 실습지로 설정하고, 1967년 9월부터 12월까지 뉴멕시코주의 고스트 랜치(Ghost Ranch)라는 캠핑장을 합숙 훈련장소로 삼았다. ‘유령 농장’으로 번역 가능한 고스트 랜치는 장로교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풍경에서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첫 보건 요원들의 훈련은 혹독했다.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인근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는 영어교사들과 달리 이들은 인디언보호구역과 병원에서 어려운 실습을 했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감염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20명의 훈련생이 고스트 랜치에 모였으나 나중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 단원은 고작 67명이었다. 많은 단원이 탈락하거나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1967년 12월 K-4 단원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보건소에 배치됐다. 군 소재지 보건소에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계획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영어가 통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선생님 대접을 받았던 기존의 평화봉사단원들과 달리 이들은 ‘보건소 미국 아저씨’ 혹은 ‘보건소 미국 아가씨’로 불려야 했다. 의료 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봉사활동을 했다. 3개월마다 보건 요원들을 대상으로 의료 지식과 기술을 공부하는 콘퍼런스가 열렸다. 살아남은 K-4 단원들은 끈끈한 전우애로 뭉쳤다.
2023년 고스트 랜치에서는
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K-4 단원들은 미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갔다. 평화봉사단 선발 5주년에는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열기도 했다. 10주년에도, 15주년에도 고스트 랜치에서 재상봉 행사를 가졌다. 그때부터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은퇴하는 시점이 되자, 아예 본격적으로 매년 고스트 랜치에서 일주일간 재상봉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제는 손자·손녀를 포함한 3대가 모이는 행사가 됐다.
2023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열린 K-4 재상봉 행사에 참여해 이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했다. K-4 단원들은 1967년부터 지금까지 고스트 랜치의 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사진이 가족사진이 되고, 사진 속의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K-4 단원들이 합심해 50여 년 넘게 이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 가족을 동반해도 이 모임이 전혀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K며느리’의 입장에서 시아버지 혹은 시어머니의 젊은 날 친목회에 남편과 함께 따라가 일주일이나 머문다는 건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이들은 50여 년간 축적된 모임의 사진과 자료 등을 모아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 작업을 하는 분께 혹시 한국 어디서 근무하셨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 당시에 사전 훈련은 아주 빡셌죠. 저는 한국에 가본 적이 없어요. 선발 과정에서 탈락(deselected)했거든요. 그래도 고스트 랜치가 좋고, 이 사람들이 좋아서 여태껏 이 모임에 나오고 있어요.”
이들이 매년 고스트 랜치에 모인다. 1967년 9월 고스트 랜치에서 사전 훈련이 어땠는지, 그해 12월 서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1968년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보건소 상황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한다. 손자·손녀를 모아놓고 한국 노래를 부른다. 이게 어디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인가. 나도 잘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에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서나래 안동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