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다리]장갑차와 구급차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원들이 휴일인 지난 8월 6일 서울 강남역 교차로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대학생 때 캐나다 어학연수에서 만난 더글러스 선생님이 수업 중에 자녀와 관련한 일화를 들려줬다. 아이는 구급차의 사이렌이 들리면 두려워하며 금세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저 소리는 누군가를 구하러 간다는 신호야”라고 말하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이를 대하는 선생님의 다정한 태도에 교실에 있던 학생들 모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태국의 한 카페에서 한국 유학을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현지인을 만났다. 그는 서울 도심에 장갑차가 배치된 사진을 보여주며 이유를 물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야” 이런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차별 흉기 난동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일상의 공간마저 위험하다는 감각이 퍼졌고, ‘살인 예고’ 글이 쏟아진다고 말했다. 장갑차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도 덧붙였다.

‘장갑차’에서 ‘구급차’를 떠올렸다. 더글러스 선생님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는 ‘위험에 처한 구성원을 구한다’는 사회적 약속이 지켜진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설명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그런 사회는 안전한 곳일까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것은 아닐지 곱씹어 보게 됐다.

무너진 안전망에 신뢰가 사라진 지 오래다. 개개인은 호신용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각자도생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안위를 확인할 뿐이다. 당분간은 자녀를 집에 머물도록 해야 하나, 그러면 아이 돌봄은 어떻게 하나, 고민에 빠진 부모도 여럿 봤다.

무고한 시민의 희생이 끊이지 않지만, ‘무(無)고민’ 정부는 보여주기식 땜질 처방을 맴돈다. 대통령이 “경찰력 총동원, 초강경 대응”을 지시하자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8월 4일 사상 첫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하며 장갑차와 경찰특공대원을 배치했다. 그로부터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한 여성이 신림동 등산로에서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조기 종료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서 불거진 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K팝 무대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문제가 해소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급급했다.

잇따른 사건은 켜켜이 쌓인 한국사회 문제의 총합, 임계점을 넘어선 징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해자 개인의 일탈,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타자화하는 데 그친다면 무력한 개인만이 남는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사회의 총체적 부는 확장됐으나 사람들은 왜 존재감과 소속감을 잃었는지, 사회 불안이 어떻게 가중됐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며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조장하는 사회적 병폐를 조금씩 바꿔가야 한다”고 했다.

젠더폭력 방지 체계 마련에 손을 놓은 여성가족부 장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하층부에 있는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고용노동부 장관,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지지 않는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을 그대로 앉힌 채 지난 8월 21일 “‘묻지마 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게으른 대통령 휘하에 부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각료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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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러 오는 거예요.” 우리는 두려워하는 누군가에게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박하얀 스포트라이트부 기자 whit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