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을 고민하던 세브란스병원 최지혜 간호사(31)는 최근 사직이 아니라 ‘정년퇴직’을 생각하게 됐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간호학과에 지원했고, 임상이 좋아서 외과병동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숨 쉴틈 없이 업무는 휘몰아쳤고, 소진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다시 일터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 쌓였다. 외과병동을 떠나 교대근무가 없는 외래로 부서를 옮긴 선배들을 떠올렸고, 사직에 대한 생각도 턱밑까지 차올랐다. 임상의 꿈은 멀어져갔다. 최 간호사는 “힘들더라도 환자분들을 돌볼 때 제일 뿌듯함을 느껴왔다. 그래서 임상을 계속해온 건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드니까 계속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번아웃’ 상태였던 최 간호사에게 병원에서 주 4일제 시범사업을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거 아니면 퇴사”라는 생각으로 고민할 것도 없이 지원했다.
지난 1월 1일부터 시작된 세브란스병원의 주 4일제 시범사업이 100일을 넘겼다. 사직을 고민하던 최 간호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연차가 쌓일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그러나 주 4일제를 경험해보니 이런 근무 체제면 이 일을 몇십년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말했다.
2017년 입사한 최 간호사는 올해로 7년차다. 아직 저연차 간호사인 듯싶지만, 26명의 간호사가 근무하는 병동에선 최고참에 가깝다. 상당수의 간호사가 고된 업무 강도로 병원을 떠났기 때문이다. 세브란스노조 관계자는 “4~10년차 간호사들의 사직률이 굉장히 높다. 한창 일해야 할 연차의 간호사들인데 일이 너무 힘들다 보니 외래, PA 간호사(진료 보조인력), 공기업 등으로 이직을 하는 사례가 많다”라며 “그러다 보니 나이 어린 신규 간호사와 나이 많은 경력자만 남는 바람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간호사가 없다”고 말했다. 신규 간호사들의 사직률도 절반에 달한다. 2022년 대한간호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신규 간호사들의 사직률은 2018년 42.7%, 2019년 45.5%, 2020년 47.7%로 매년 높아지고 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은 “1년 미만 이직률이 47%라는 것은 다른 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심각하게 봐야 할 통계다”라며 “궁극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간호사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간호 서비스의 질을 높이면서 간호사들의 이직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동료들의 잇따른 퇴사로 불안감은 더해지고 업무부담은 늘어난다. 신규 간호사들이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보니 숙련된 인력이 점점 더 부족해진다. 최 간호사와 같은 병동에서 일하는 이혜진 간호사(31)는 “어떤 근무일은 어느 정도 숙련된 간호사가 나 혼자다. 내 뒤로 1~2년차 신규 선생님들만 있는 날도 있다”라며 “그런 날은 너무 벅차다. 업무를 하면서도 신규 선생님들 트레이닝도 해야 하고, 하루가 정신없이 힘들다. 그런 근무일이 다가오면 미리부터 두렵다”라고 말했다.
세브란스의 주 4일제 실험 간호사들의 높은 사직률 배경에는 장시간 노동, 야간 교대근무, 무급노동, 감정노동 등 열악한 근무환경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하루 8시간(주 40시간) 근무지만, 출퇴근 시간 앞뒤로 인수인계·차팅(간호 기록) 등 일상적인 업무를 하다 보면 10시간이 훌쩍 넘는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간호사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0.6시간이다. 게다가 3교대 근무로 근무시간이 불규칙하다.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지 않는 특례업종이어서 초과근무는 수시로 발생한다.
세브란스노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뒤얽혀 있는 ‘간호사 퇴사’의 해법을 ‘주 4일제’에서 찾기로 했다. 지난해 8월 세브란스노조와 연세의료원은 ‘주 4일제’ 시범사업에 합의했다. 3개 병동, 30명에 제한된 작은 규모이지만, 병원 최초로 그것도 ‘노사합의’로 주 4일제를 실시한다는 점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노조는 원칙적으로는 임금 삭감 없는 주 4일제를 지향했지만, 소규모 시범사업이다 보니 형평성을 위해 10%의 임금삭감을 사측과 합의했다. 주 4일제에 따른 인력 충원은 병동당 1.5명, 모두 5명이다.
100일이 지난 현재, 시범사업에 참여한 간호사들의 반응은 고무적이다. 최지혜 간호사는 “월급이 깎이는 것에 대해 아쉬운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깎이는 게 10% 정도라면 만족도는 제곱으로 올랐다”고 말했다. 최 간호사는 1년 전 주 5일제 근무표와 이달의 주 4일제 근무표를 비교해 보여줬다. 주 5일제 근무표에는 금요일 야간근무를 마친 후, 월요일 낮 근무로 출근하는 날도 있었다. 금요일 밤 9시부터 토요일 오전 7시까지 일을 하고, 월요일 오전 6시가 못 돼 출근하는 스케줄이다. 병원을 떠나 있는 시간이 48시간이 안 된다. 주 4일제 근무표에는 일주일에 4일을 쉬는 주도 있다. 최 간호사는 “주 5일제일 때는 개인 활동은 하나도 못 했고, 휴일에는 모자란 잠을 자는 것만으로 시간이 다 갔다. 주 4일제를 하니 운동도 하게 되고 길게 쉬는 주에는 여행도 다녀올 수 있다. 꿈도 못 꿨던 일이다”라고 말했다.
되찾은 일상은 일터의 활력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혜진 간호사는 “매일의 업무 강도는 여전히 높다. 하지만 쉴 수 있는 날이 늘어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라며 “과거에는 몸이 힘들다 보니 일이 끝나면 빨리 가서 쉬어야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요즘은 체력이 회복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다 보니 환자나 보호자들의 마음에 더 공감하게 됐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환자분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면, 내일부터 3~4일 쉴 수 있으니 좀더 이야기를 들어드리자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최근 들어 환자분들의 칭찬 메일도 많이 받는다”라고 말했다. 최지혜 간호사는 “병원에서는 비용 문제 때문에 주 4일제를 확대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지금은 고작 6개월 하니까 운동을 할 수 있고 체력이 좋아졌다는 정도의 1차원적인 만족도만 드러난다. 하지만 2년을 하고 3년을 하다 보면 간호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 4일제의 장기적인 효과는 병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리라는 기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주 4일제가 직원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업무효율성을 높인다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병원 사례로 잘 알려진 연구가 2015~2017년 스웨덴 예테보리시의 한 노인 요양병원의 노동시간 단축 실험이다. 주 4일제는 아니지만, 1일 8시간(주 40시간) 근무시간을 1일 6시간(주 30시간)으로 단축하는 실험이었다. 급여 삭감 없이 68명의 요양보호사가 1일 6시간 노동으로 전환됐고, 17명이 추가로 고용됐다. 비용은 시의 공적 자금으로 충당했다. 실험 결과, 노동시간 단축이 돌봄의 질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주 40시간을 시행하는 인근 다른 요양병원과 비교한 결과, 직원들의 건강과 업무효율성이 함께 증진됐다. 다니엘 벨머 예테보리시 의원은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을 때 일상적 상호작용도 개선됐다.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움직인 하루 활동량도 60%가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직원들의 병가 일수도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시범사업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주 4일제의 핵심 중 하나가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과로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이탈하는 것을 막고 숙련된 노동자들이 오래 재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며 “기업 또한 주 4일제를 통해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첫 ‘노사합의’ 주 4일제 국내에서도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일부 기업들이 주 4.5일제·주 4일제를 도입한 바 있다. SK, 포스코 등 대기업 일부 계열사에서 격주 주 4일제 등 근무시간 단축을 도입했다. 배달 플랫폼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이 주 4.5일제를 시행 중이고, 카카오도 격주 주 4일제를 도입한 바 있다. 교육기업 에듀윌, 전자상거래 플랫폼 회사 카페24 등도 주 4일제를 도입했다.
이들 기업은 모두 경영자의 결정으로 주 4일제를 시행했다. 김종진 소장은 세브란스병원의 주 4일제 시범사업이 ‘노사합의’로 이뤄진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았다. ‘노사합의’가 없는 ‘주 4일제’ 도입은 불안정한 근무여건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경영자의 결정으로만 주 4일제를 시행한다면 언제든 후퇴할 수 있어서다. 카카오와 에듀윌은 경영 상황 등의 이유를 들어 주 4일제를 축소하거나 중단한 상태다. 김 소장은 “주 4일제가 명시적으로 근로계약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심리적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회사가 주 4일제를 사회적으로 천명하고 직원들은 이에 대한 기대로 회사에 들어온 것이다. 주 4일제 중단은 회사가 그 계약 관계를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며 “주 4일제가 법제화가 안 된 상황에서는 회사가 언제든 이 같은 결정에서 후퇴할 수 있다. ‘노사합의’로 해야 지속가능하다”고 말했다.
주 4일제를 지금과 같은 노동환경에서 도입한다면, 정규직 고소득 업종에만 그 혜택이 돌아가리라는 우려도 있다. 저임금과 임금불평등이 심하고 특수고용직·플랫폼 노동자처럼 법정근로시간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주 4일제 도입은 노동 격차를 더 벌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각각 주 4.5일제, 주 4일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노동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주 4일제가 대선 의제였을 때 민주노총 내에서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주 5일제도 제대로 안 되는데 주 4일제가 가능하겠느냐는 반응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정부가 최대 주 69시간을 근무할 수 있는 내용의 노동시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잊혔던 대선공약인 ‘주 4일제’가 정치권에서 새롭게 조명됐다. 지난 3월 22일 이재명 대표는 “국민을 과로사로 내모는 노동개악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주 4.5일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이수진 의원, 김영주 의원은 근로시간 단축을 하는 기업에 정부와 지자체가 인센티브를 주는 ‘근로시간 단축 지원 법률안’도 잇따라 발의했다. 하지만 주 4일제를 당론으로 확장하는 등의 더 진전된 논의는 없다. 주 4일제가 아직 전 국민적 공감대로까지 확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응하는 정치적 카드로만 이를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명안전 업무·산재율 높은 산업부터 주 4일제가 공감대를 넓히려면 생명안전 업무나 산재율이 높은 사업장에 적용할 수 있는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은 “병원마다 간호등급이 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환자들에게 서비스가 좋고 수가도 높다. 지방에 있는 병원들은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등급 외를 받는 사례도 많다”라며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한다면 엄청난 인력이 또 서울로 빨려들어갈 수 있다. 열악한 지방 병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진 소장은 “사무관리, 전문직, IT 등은 주 4일제를 도입하면 업무효율성 증가로 사실상 추가인력이 없어도 가능할 수 있다. 병원처럼 교대제로 운영되는 데는 추가인력이 필요하다”며 “영세 중소기업처럼 양극화된 노동시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시적 지원을 통한 정부의 정책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비롯해 장시간 노동을 방지하는 법제화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법제화가 안 된다면 병원 등 생명안전 업무를 하는 업종이나 산재·고위험 사업장을 중심으로 산별 협약을 통해 ‘주 4일제’를 먼저 도입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라며 “이런 사업장부터 노사정 협약을 통해 시범사업을 해본다면 국민의 동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11일 칠레 의회는 노동시간을 현행 주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칠레는 하루 최대 10시간 근무를 허용하고 있어 법안이 시행되면 주 4일 노동이 가능해진다. 칠레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우리와 비슷하다. 2021년 기준 칠레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916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3위다. 한국은 1915시간으로 4위다.
노동시간 단축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정부 혹은 개별기업의 주도로 주 4일제 실험이 한창이다. 정부 주도로 주 4일제를 추진해 안착시킨 대표적인 나라로 아이슬란드가 꼽힌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수도인 레이캬비크 시의회와 함께 2015~2019년 4년간 전체 노동인구의 1%인 2500명을 대상으로 주 4일제를 실험했다. 유치원 교사, 회사원, 사회복지사, 병원 종사자 등 다양한 직군이 참여한 이 실험은 ‘엄청난 성공’으로 평가됐다. 임금 삭감 없이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5~36시간으로 단축한 결과, 생산성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향상됐다. 노동자들의 업무만족도가 높아지고 신체적·정신적 건강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결과를 토대로 아이슬란드 노동조합은 기업과 근무방식을 재협상했다. 현재는 전체 근로자의 86%가 노동시간 단축 적용 대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해 200개 희망기업을 선정해 3년 동안 주 4일제(주 32시간)를 실험하기로 했다. 진보정당 ‘마스 파이스(Mas Pais)’의 제안을 스페인 정부가 받아들여 추진하게 됐다. 정부는 3년 동안 주 4일제를 희망하는 기업들에 근무시간 축소에 따른 비용을 지원한다.
최근 캘리포니아 등 미국 주의회에서는 주 5일제(주 40시간)를 주 4일제(주 32시간)로 변경하는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지난 3월 초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마크 타카노(Mark Takano)는 주 40시간을 32시간으로 단축하는 법안을 재발의했다. 타카노 의원은 2021년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지만, 표결에 부쳐지지 못했다. 메릴랜드주에서는 오는 7월부터 주 4일제를 도입하는 기업에 최대 1만달러의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이 발의됐다.
연평균 노동시간이 1349시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독일도 노조를 중심으로 주 4일제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 독일 금속노동조합은 올해 급여 삭감 없이 주 35시간 근무를 32시간으로 줄이는 주 4일 근무협상을 위한 단체교섭을 사측과 벌일 예정이다.
정부 주도가 아닌 개별 기업들의 주 4일제 실험도 확산 중이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61개 기업, 29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주 4일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국제 비영리단체인 ‘포데이 위크 글로벌(4days week global)’과 싱크탱크 ‘오토노미(autonomy)’가 기획하고, 케임브리지대·옥스퍼드대·보스턴대 연구원들이 분석을 담당했다. 급여 삭감 없이 주 평균 34시간 근무를 시행한 결과, 참여 기업의 92%인 56개 기업이 이 제도를 계속 유지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기업들의 수익은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평균 35% 증가했다. 퇴사자도 57%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노동자의 71%가 번아웃에서 벗어났다고 응답했으며, 55%는 업무 효율성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남성 노동자의 육아 참여도 또한 2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