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국방부·문화재청 복마전에
강제동원 등 근현대사 품은 건물 잃나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449. 행정구역상 분명한 한국 영토다. 그런데 이 부지 전체를 보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인 중 누구도 이 구역을 완벽히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 수수께끼 같은 구역은 심지어 명칭도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2020년 이후 이곳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부평공원 앞 공원’이다. 195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미군기지 ‘캠프마켓’(또는 애스컴·ASCOM)이다.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 보면 독특한 이름 하나가 더 나온다. 193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 ‘일본군 조병창’이다.
이처럼 한 공간에 다양한 역사가 서린 곳은 희귀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산곡동 449만의 특징은 따로 있다. 일본군 조병창, 미군기지 등을 거치며 한국인의 접근이 차단됐고 개발 바람도 비껴갔다. 쉽게 말해, 그게 어떤 역사든 과거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일종의 ‘타임캡슐’이 됐다는 말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단순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넘어 ‘차이나타운’으로 유명한 인천 개항지, 근현대 건물들이 남은 군산, 목포처럼 관광지로 도약할 수도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건물이 남아 있을 때 얘기다.
주간경향은 2021년 10월, 일본군 조병창 철거 문제를 연속 보도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흔적으로서 조병창의 가치를 밝히고, 철거하더라도 ‘조사 및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어떤 결과를 맺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여가 지났다. 결과적으로 조병창 주요 건물은 철거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거를 결정한 주체는 여전히 없다. 이 문제와 관련된 인천시, 국방부, 문화재청 모두 “우리가 철거를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그게 가능하다.
관련법에 맹점이 있는 상황에서 A기관은 B탓, B기관은 C탓, C기관은 다시 A탓을 하면 된다.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남 탓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건물 철거가 가능하다. 법은 미군기지로 활용된 땅을 국방부가 정화해 지자체에 반환할 것을 규정했다. 하지만 그 땅 위에 서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논의가 없다. 이 한계를 이용해 ‘부작위’, 즉 ‘건물을 보존해달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명시적으로 ‘철거하라’는 말 대신 “우리는 저쪽 기관 방침에 동의를 표했다”는 기상천외한 답변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어떤 일이 발생하든 책임도 없다’는 뜻이다.
조병창 내에 있는 이른바 ‘1780’ 건물(옛 병원건물)부터 이 방식으로 헐릴 예정이다. 많은 연구자가 보존 필요성을 지적했고 일제강점기, 미군기지 시절 사진에도 상징처럼 찍혀 있던 바로 그 건물이다. 정확한 철거일정을 묻는 질문에 국방부는 인천시에, 인천시는 국방부에 물어보라고 했다. 철거 결정자도 책임자도 향후 일정까지도 없는 다른 의미의 깔끔한 일처리다. 유일하게 있는 것은 향후 밀어버린 지역을 개발해 얻을 이득뿐이다.
사실 이 지역에 아파트를 짓든, 호수공원을 만들든 눈 한 번 질끈 감아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실제로 주변 집값이 상승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의 갈등은 피할 수 있다. 문제는 본인들에게 특별한 이득이 되지 않음에도 건물을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겨울 캠프마켓 정문 옆에 ‘천막 농성장’을 만들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조병창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기만과 조롱을 감내하며 싸움을 시작한 것은 이들이 개발을 외치는 사람들보다 미련해서가 아니다. 협의마저 막혀버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소란’뿐이기 때문이다. 다툼이 발생하면 관련 ‘기록’이 남는다. 지금 없애 버리려는 것이 일제강점기 조병창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억울함’이라는 바로 그 기록이다.
1년 넘게 논의하고 원안대로 철거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3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같은 시각 ‘캠프마켓’(조병창) 앞에 모인 100여명의 사람들은 “강제동원의 증거 부평 캠프마켓 내 일본조병창 병원건물을 지켜주세요.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게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이날 대통령과 시민들은 같은 의미의 말을 했다. 다만 대통령의 당부와 달리 현실에서는 정부가 기억해야 할 역사를 없애는 주체가 돼 있을 뿐이다.
무기 및 전쟁 관련 장비를 만드는 공장을 의미하는 ‘조병창’은 명칭부터 낯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천 조병창’은 전범국 일제가 열도 밖에 설치한 유이한 군수공장이었다. 사람들이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일본국 영토 밖에 흔치 않은 전쟁범죄의 증거가 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제는 1939년 인천 부평에 조병창을 만들고 당시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했다. 일제가 작성한 극비문서에 따르면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된 전체 노동자 수는 총 1만1300명이었다. 이중 약 9000명이 조선인이었다. 이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인천 및 경성의 주요 중등학교에서 끌려온 약 930명이었다.
이중 몇 명이나 작업 중 상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었는지는 가늠이 어렵다. 다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추론해볼 수는 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철거 1순위로 꼽히는 1780 건물, ‘병원’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병원은 수혜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상징이다. 죽지 않았다면, 치료해서 다시 착취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위험한 일에 사람들을 강제동원했는지, 그 일이 상해를 입지 않고 과연 가능한 작업이었는지를 추적하는 시작점이자 상징적인 장소가 병원이다.
그럼에도 병원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는 있다. 건물 밑 토양이 오염됐고, 정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미군기지로 활용됐던 땅 전반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문제다. 이에 대한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토양에 어떤 오염이 있느냐, 둘째는 해당 오염의 정화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느냐다. 이 논의가 1년이 넘도록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다 결국, 건물 철거 후 토양정화를 하는 원안으로 결론이 났다.
누가 문제인가
사실 1780 병원건물 철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의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인천시와 조병창 문제를 두고 협의에 참석했던 김형회 전 인천시 시민참여위원회 위원은 “아무리 문제와 대안을 설명해도 ‘철거’라는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안이 복잡해지는 것은 결국, 누군가 진의를 드러내지 않아서다. 논의 과정에서 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살펴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토양에 어떤 오염이 있느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거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발암물질’ 가능성을 주장한다. 토양오염 정화의 주체인 국방부에 다시 문의했다. “유류(기름)오염 그 이상은 없다. 지금까지 발암물질은 일체 나온 것이 없다”는 종전 대답이 그대로 나왔다. 토양에 접근해 오염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주체는 사실상 국방부가 유일하다. 공포감 조성 목적이 아니라면 “발암물질이 있다”는 식의 주장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정화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이냐’다. 1780 건물의 철거 후 토지정화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크게 ‘비용’과 ‘기한’ 문제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은 비용 문제다.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토양을 정화하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 철거 측 논리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얼마가 드는지 사용 공법에 따라 천양지차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일단 철거로 방침이 정해지면 어떤 방법을 가져오든 “불가능하다. 추가 비용이 든다”는 식으로 논의를 끝내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문화재청이 작성한 ‘캠프마켓 1780번 건물 보존을 위한 기술적 방안 검토’라는 문서가 있다. 해당 문서의 결론인 ‘검토의견’을 보면 “1780 건물의 원위치 보존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판단돼 해체하지 않고 건물기초를 보강한 후 오염 토양 정화 공사를 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나온다. 이를 위한 공사 방식까지 포함돼 있다. “압입말뚝을 사용해 상부건물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내력확보 지반까지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소요 예산도 있었다. 약 5억원이다.
왜 이 방안을 도입하지 않았는지 인천시에 물었다. 관계자는 “개략적으로 업체에 자문을 구해보니 이 방식만으로는 불안하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답했다. ‘개략적·자문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인천시 차원에서 전문업체에 물은 것이라면 해당 업체와 구체적 내용을 밝힐 수 있는지’ 다시 물었다. 이 관계자는 “용역을 발주해 구체적 문서로 남긴 것이 아니다. 어느 회사에서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한 것인지도 말하기 곤란하다”고 답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5억이든 50억이든 정화를 해야 하는 것은 국방부다. 국방부는 정화 방침 자체가 건물을 다 철거하고 토양을 정화하는 것이지 건물을 보존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건 아니다. 국방부는 이에 필요한 돈을 낼 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국방부에 똑같이 물었다. “국방부는 만약 인천시가 1780 건물을 유지한 상태에서 토지정화를 원한다면 협조할 것”이라며 “다만 토양오염 정화는 국방부 예산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위의 건물 보전은 인천시 예산으로 하는 것이다. 문화재청 제안은 인천시가 5억원 이상의 금액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핵심은 이렇다. 오염된 토지정화에 소요되는 비용까지만 국방부가 부담한다. 즉 만약 건물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 비용은 인천시 부담이다. 국방부는 만약 인천시가 건물 유지를 원하면 협조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은 자체 검토를 통해 건물을 유지한 상태에서 토지정화를 할 수 있는 공법을 제안했다. 5억원 예산이다. 인천시가 관련 업체에 자문을 구해보니, 5억원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 거절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천시가 이 업체가 어디인지, 문화재청이 제안한 공법의 어디가 문제였는지 등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면, 1780 건물의 철거는 돈 때문이다. 그런데 인천시 관계자는 “비용 문제가 아니다”고 거듭 밝혔다. 그렇다면 ‘기한’ 문제를 따져볼 수 있다. 토양환경보전법 등에 따르면, 국방부의 토지정화 의무 기한은 2023년 12월까지다. 국방부는 그 전에 토지정화를 완료해 인천시에 소유권을 넘겨줘야 한다. 인천시 관계자는 “건물을 부수고 정화하는 것 외에 정해진 기한 내에 가능한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대안이 있다. 환경부가 주관하는 위해성 평가 대상을 신청해 인정을 받는 방법이다. 위해성 저감 대상이 되면 토양정화의 범위, 시기 및 수준 등 조정이 가능하다. 2023년 12월이라는 기한 제약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방부와 인천시의 협의가 필요하다. ‘국방부와 정화 기한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협의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인천시 관계자는 “올해 12월 31일을 넘기면 부평구가 국방부를 행정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해성 평가 신청도 어렵다고 했다. “2021년 구두로 환경부에 문의해보니 문화재 상당의 가치가 정해져야 위해성 평가 인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환경부에 문의한 결과, “토양환경보전법상 문화재 지정 여부와 관한 사항을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는 서면 답변을 받았다.
양측의 말이 다르다. 환경부 토양지하수과에 직접 문의해봤다. 환경부 관계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인천시가 자꾸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인천시에 문화재 지정을 해야 위해성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천시 관계자가 나와 통화한 것 같은데 그 당시 인천시가 건물을 보존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위해성 평가 대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문화재 지정을 해두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문화재 상당의 가치가 있어야만 신청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의 자기기만
이제 이 복마전을 끝내야 할 때다. 결국 돌고 돌아 핵심은 1780 건물을 포함해 ‘일본군 조병창’ 건물이 보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로 모아진다. 우선 인천시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1780 건물이) 원형보존이 안 돼 근대문화재로 등록하기 곤란하니, 토양정화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남겨달라고 해서 그렇게 정리했다. 인천시는 철거를 요청한 것이 아닌 문화재청 의견에 동의한다고 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 의견이다’는 주장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발언대로라면 1780 건물의 철거는 전적으로 문화재청의 판단 때문이다. 문화재청에 입장 표명을 요청했다. 답변을 거부했다. 다시 인천시가 전한 내용을 보자. “원형보존이 안 됐다”가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등록하기 어렵다고 밝힌 이유다. 이상의 인천대 교수는 “1780 건물에는 일제의 침략전쟁 역사가 있고, 그다음에는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건물 가운데가 끊어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그다음에는 미군이 들어와 본래 구조를 둔 상태에서 그 위에 보수한 흔적까지 남았다. 건물 하나에 한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다 남은 보기 드문 사례”라며 “무엇보다 이 건물 안에 머물렀던 것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1780 건물에 대한 문화재청의 검토의견서, 조사의견서 등과 인천시가 전한 문화재청의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1780 건물의 원위치 보존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판단돼 해체하지 않고…”가 검토 의견이었다. 조사 의견에는 “1776~1780 건물인 조병창 병원은 강제동원자들을 비롯한 인원들의 부상 및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시설로서… 해방 이후 조병창 병원건물은 미군 382 병원으로 사용됐다…. 1780 건물은 일본육군조병창 병원뿐만 아니라 미군기지 시기의 의미 역시 가진다고 할 수 있어 그 다양한 역사적 층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원형보존이 안 됐다”는 결격사유는 문화재청이 스스로 밝힌 “다양한 역사적 층위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자연스레 반박된다. 인천시 주장이 사실이라면 문화재청은 ‘자기부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기자가 만난 한 문화재위원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원형보존이 안 돼 가치가 없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공식 입장이면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해당 안건을 상정해 심의를 거치거나 문화재위원회에서 공식 의견으로 결정한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전혀 없다”며 “심의나 자문 안건으로 상정도 하지 않고 공식 입장을 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천시가 주장하는 문화재청의 의견이라는 것이 가결/부결이 표시된 문서로 제시된 것도 아니고, 결국 문화재위원 한두 명의 의견이거나 문화재청 직원의 의견을 공식 입장인 것처럼 왜곡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학계 전문가는 “조병창 내 많은 건물이 밀집한 D구역이 있는데 문화재청 내부에서 1780 건물은 내주고 D구역을 살리자고 논의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고, D구역은 어떻게 지키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말 가치가 없나
유물·유적의 철거는 신중해야 한다. 지금 당장 폐건물처럼 보여도 연구해 보지 않으면 그 가치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술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관광 등의 실질적 경제 활성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당장 1780 건물이 쓸모없어 보여도 어쩌면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해당 건물은 제대로 된 연구가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3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수집한 사진들이 있다. 미군 통신대(Signal Corps)는 별도의 사진 부대를 운영했는데, 이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시기 한국과 관련한 사진을 다수 남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보관소(NARA)에 잠들어 있다가 국사편찬위원회가 기록 수집 차원에서 국내로 들여와 공개했다. 인터넷 검색 몇 번이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자료지만 이 사진의 의미를 대부분 잘 모른다.
다행히 미군 통신대는 사진 뒷면에 촬영 대상이 누구이고, 언제, 어디서 촬영했고, 어떤 상황인지 등을 개략적으로 남겼다. 이에 따르면 해당 사진은 1948년 9월 13일에 촬영됐다. 오른쪽 웃고 있는 여성은 이창(장)화씨다. 왼쪽에 손을 뻗고 있는 남성은 간호대대장 라우어 소령이다. 사진 설명에 따르면 382 위수병원 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4명의 간호사 중 한명인 이창(장)화씨가 학위를 수여받는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소다. 에스컴 시티, 캠프마켓이다. 즉 캠프마켓에 설치된 382 위수병원에서 한국인 간호사들이 배출됐다. 병원의 과거 이름은 일본군 조병창 병원, 즉 철거 예정인 1780 건물이다.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허광무 박사는 “382 위수병원에서 배출된 간호사들은 한국군 최초의 간호장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군간호사관학교는 1951년 창설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작은 부분이지만 연구결과에 따라 역사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간호장교 역사가 뭐가 중요하냐, 철거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를 꼽으라면 대표적인 사람이 김중업이다. 조병창을 접수한 미군은 용도에 맞게 건물 개·보수가 필요했는데 여기에 한국인 건축 설계사들을 모집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한국인 12명, 미국인 12명이 모였는데, 당시 이창호라는 건축사 역시 이 12명 안에 포함돼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씨의 아들 홍필씨는 2021년 12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술로 남겼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게 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한국인 12명을 이끌었던 팀장이 김중업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중업의 일대기를 다룬 책과 기사를 보면, 그가 1946년 ‘경기도 부평에 소재하고 있던 미군 24군단 사령부에서 설계일을 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씨가 아버지로부터 듣고 구술한 이야기 중에는 김중업이 미군기지에서 설계일을 그만두게 된 과정도 있다. ‘미군 군속과의 불화’로 알려져 있는데 이씨는 해당 부분의 상세한 내용을 구술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지금부터다. “어느 날 김중업이 건물 내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사람 이름이 ‘이중섭’이었다. 설계일보다는 제도판 모퉁이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당시 미국인 팀장이 그걸 보고도 지적 한 번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하더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김중업은 이중섭과 교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허무맹랑하다고 느껴도 어쩔 수 없다. 현재로서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한국인 중 누구도 조병창 안에 정확히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중섭의 흔적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도 들어가서 조사한 적도 없고, 제대로 연구한 적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까. 역시 모를 확률이 높다.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몰라도 밀고 개발을 해야 하니까.
지난 3월 1일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는 일장기가 나부꼈다. “집값이 오르는데 역사가 대수냐”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종종 보게 될 모습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