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화물연대 파업은 패배로 끝났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온갖 기발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제 ‘노조 때리기’ 말고는 지지율을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현 정부를 규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자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이 등을 돌린 노동운동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6일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총력투쟁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성동훈 기자
왜 노조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가?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려면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는 현 상황에 대한 객관적 묘사다. ‘살기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한다’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기 힘든 사실 판단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자체가 정상적인지는 다른 문제다. 노동자가 파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가?
오로지 자기 조합원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노조가 실제로 존재한다. 비정규직 차별을 묵인하는 정규직 노조도 있다. 민주노총은 정규직 중심의 조직이고, 불안정 노동자의 권리에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이런 것들 외에도 노동조합이 대중에게 미움받을 이유는 수없이 많다. 애초에 파업이라는 수단 자체가 비조합원의 불편을 필연적으로 동반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그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파업의 필요성에 공감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그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노동운동 내부에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일반적 시선과 상관없이 절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파업은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라는 점이다. 권리의 주체가 선하든 악하든,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주변의 지지를 받든 말든, 권리는 권리다. 지금 한국에서 파업을 하면 공권력의 노골적인 탄압이 뒤따른다. 그에 맞서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여론전이다. 비조합원 시민 일반의 지지가 파업의 전제 조건이 됐다는 것은 권리가 권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해 노조의 파업이 실패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권리가 부정되는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평가다. 내가 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왜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가? 물론 타인의 지지와 공감은 내 권리 행사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겠지만, 그것이 권리의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노동조합이 대중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는 노동조합이 신경 쓸 문제다. 이걸 외부에서 대신 고민해줄 필요는 없다. 시민들이 집중해야 할 문제는 헌법적 권리가 비정상적 법률과 억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왜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이토록 싫어하는가?’ 보다 ‘왜 다른 시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상황을 용인하거나 지지하는 시민이 이토록 많은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정부가 노조 때리기에 나서면, ‘국가권력이 우리 시민을 억압한다’라는 인식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국가가 대신 때려잡아 준다’라는 인식이 더 큰 정치적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노동운동의 패배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를 의미한다.
권리와 의무 시민의 몇 가지 권리와 의무를 재확인하자. 모든 시민은 정치적 의제에 관한 자기주장을 하고, 타인의 의견을 찬성 또는 반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타인의 발언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다. 여당과 야당 지지 단체 모두가 집회를 하고 서로 갈등하지만, 상대방의 집회 자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안전운임제를 반대하는 발언이나 행위는 시민의 권리로서 보장된다. 안전운임제를 위한 노동자의 파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파업은 그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내 차가 막힌다고 다른 시민의 집회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내 생활이 불편하다고 파업 중단을 요구할 수도 없다.
다른 시민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정치적 의무다. 노동조합 자체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거나 파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국가권력이 파업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다면,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무가 일반적 규범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 다수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자신이 증오하는 집단을 국가권력이 때려잡아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이들은 다른 시민의 권리뿐 아니라 자신의 의무도 거부한다. 이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화물연대 파업 당시, 몇몇 조합원이 파업 불참 노동자의 화물차에 쇠구슬을 발사한 사건이 있었다. 파업 상황에서 노동자 사이의 폭력이 발생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이 사건을 언급하며, 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대응은 문제지만, 불법행위를 저지른 노조도 잘못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이 두 사건은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것이 아니다. 설사 노동조합에 악인만 가득하다고 해도, 파업에 대한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도의 문제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노동자는 그에 맞는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의 폭력과 파업의 정당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행위가 권리로서 보장된다는 말은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정당하다는 의미다. 나는 친구의 다이어트를 지지 혹은 반대할 수 있지만, 정당하다 아니다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는 주변 요소들을 제거하고, 파업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가 권리로서 보장되고 있는지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권력 관계가 권리-의무 관계를 대체한다. 약자의 의무와 강자의 권리만 넘쳐나고, 약자의 권리와 강자의 의무는 쉽게 무시된다. 내게 힘이 있으면 내 요구는 권리로 인정되지만, 힘이 없으면 ‘생떼’ 취급받는다. 이런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약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으레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이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약자는 애초에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약자인 것이다. 법률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권리와 현실에서 작동하는 실질적 권리를 구별하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 그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한 힘 없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만이 실질적 권리라고 불릴 수 있다. 다수의 마음을 얻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는 종이 쪼가리 위에나 존재하는 텅 빈 권리일 뿐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