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 기억되는 탄광 산재, 시로 써서 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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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시인’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 인터뷰

‘아빠! 오늘도 무사히.’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삼척탄좌 수평갱 850 입구 위엔 이 문구가 붙어 있다. ‘850’은 이 수평갱이 해발 850m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2001년 삼척탄좌 폐광 이후 이곳은 동굴 갤러리로 변했지만, 탄광에서 안전하게 돌아오길 기원하는 광부 자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부 출신 시인인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이 지난 9월 27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삼척탄좌 수평갱 850 입구 앞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 소장은 1986년부터 5년간 삼척탄좌에서 광부로 일했다. / 강윤중 기자

광부 출신 시인인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이 지난 9월 27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삼척탄좌 수평갱 850 입구 앞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 소장은 1986년부터 5년간 삼척탄좌에서 광부로 일했다. / 강윤중 기자

이 문구가 무색하게도 “한발은 일터에 또 한발은 지옥에 걸치고 석탄을 캐는 광부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행히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에서 무사히 돌아온 광부들은 직업병에 시달려야 했다. “날마다 캐내는 석탄 생산량에 비례해 폐 속에서 자꾸만 자라나는 진폐증의 씨앗들” 때문이다.

“연탄은 이제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고 탄광촌도 이젠 폐광 카지노로만 기억”되지만 “광부들의 피땀 흘린 노동 역사와 진폐재해자 투쟁에 대한 보고서”를 시로 쓰는, 삼척탄좌 광부 출신 시인이 있다. 지난 9월 <광부의 하늘이 무너졌다>(푸른사상)를 출간한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65)이다.

“28, 44, 229, 223, 222, 201…/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피를 나눈 아들 형제 아버지이고/ 또 누군가에겐 따스한 체온으로 각인된/ 정겹고 사랑하는 남편이었을 사람들이다// 1979년 4월 14일 정선군 함백광업소 화약 폭발 사고/ 28명이 한순간 목숨 잃은 사고 현장 처참했단다/ 10월 27일 문경시 은성광업소 갱내 화재 때는/ 광부 44명이 아비규환 생지옥에서 하나둘 죽어갔다/ 1973년부터 매년 탄광 사고로 목숨을 잃어/ 숫자로만 세상에 남겨진 광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연탄불로 밥을 짓고 겨울을 나던 산업화 시대/ 높은 곳의 불호령에 연탄 파동은 겁이 나도/ 사망 사고는 보상금 몇 푼이면 해결할 수 있기에/ 회사는 늘 안전보다 생산이 먼저였다/ 자고 나면 탄광 사고 소식 우물방송으로 퍼지고/ 날벼락처럼 또 한 가정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광부의 하늘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무너져도/ 광업소 정문 간판 구호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 ‘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광부의 하늘이 무너졌다 1’)

성 소장은 삽과 곡괭이 대신 시를 통해 숫자로만 기록된 광부들의 죽음에 온기를 불어넣고, 잊힌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있다. 주간경향은 지난 9월 27일 정선군 사북읍 광산진폐권익연대 사무실에서 광부 작업복을 입고 진폐 상담 업무를 하고 있는 성 소장을 만났다.

-처음에 어떻게 시를 쓰게 됐나.

“시나 문학 공부를 따로 한 건 아니지만 탄광노동자의 피땀 어린 노동의 역사와 진폐 문제를 시로 써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저명한 시인이 탄광에 잠시 와서 이곳의 현실을 보고 간다 해도 광부들의 절박하고도 처절한 노동을 어떻게 깊이 알 수 있겠나. ‘광부 출신인 내가 해봐야지’라는 생각에 조금씩 시를 썼고, 첫 시집이 1991년에 나오게 됐다.”

-1991년 <광부의 하늘>, 1994년 <그대 가슴에 장미꽃 한송이를>에 이어 28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서둘러서 2권의 시집을 내놓고 보니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 시집을 내면 시다운 시, 완성도 높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 이후 진폐 재해자를 위한 싸움을 오랫동안 해온데다 탄광이라는 현장에서 떨어져 있으니 시가 잘 안 써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세 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번 시집을 통해 세상에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한국사회는 탄광에서 죽어간 광부들의 죽음을 단순한 숫자로만 기억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이 숫자엔 수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서 ‘망자의 날’을 정해 죽은 이를 기억하듯이 광부 출신인 나라도 탄광 산재 사망사고의 역사를 시로 기록하고 싶었다.”

성 소장은 “광부에서 진폐 환자로 이름이 바뀐 사람들”을 ‘프로메테우스의 후예’에 비유했다.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날마다 간을 찢기는 벌을 받게 되고/ 저승사자와 싸우며 지하의 불을 훔친 광부들을/ 폐가 돌덩이로 굳어가는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다”(‘메두사와 저승사자’)

-시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진폐증이다.

“1985년 진폐법이 제정·시행됐다. 하지만 합병증이 발견된 진폐병원 요양환자와 달리 ‘재가 진폐환자’는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2007년 진폐환자 생존권 확보 투쟁위원장을 맡아 갱목(갱도 버팀목) 시위, 31일간의 단식, 단지(斷指) 등을 하면서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이 단지는 1989년 여의도 평민당사 앞에서 탄광노동자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했던 단지 이후 두 번째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1만2000여명의 재가 진폐환자들도 2010년부터 매달 진폐기초연금을 받게 됐다. 숨 쉬는 일도 고통인 진폐 재해자들이 함께 싸워 얻은 결과물이었다. 이런 진폐 투쟁의 기록을 시로 남기고 싶었다.”

광부 출신 시인인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이 지난 9월 27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광산진폐권익연대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광부 출신 시인인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이 지난 9월 27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광산진폐권익연대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시집 제4부 ‘1970년 흥국탄광 이야기’엔 당시 흥국탄광 김진웅 기획과장의 고백이 담겨 있다.

“1970년 12월 10일 삼척시 도계읍 흥국탄광(현 경동탄광)에서 석탄층에 모여 있던 지하수가 터져나오는 ‘물통사고’가 나 5명이 희생됐다. 이후 신봉희씨는 구조작업 중 사망해 모두 6명이 숨졌다. 사고 뒤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0년쯤 백발이 무성한 김진웅씨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참회의 변을 담은 메모지를 건넸다. 세상에 이 이야기를 알려달라면서 말이다.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목전에 죽음을 앞둔 악인이라도 올바른 고해를 한다면 조금은 낫게 생을 마감한다 했던가. 고해하건대, 당시의 그 재해는 분명히 나의 과오 때문에 발생했다. 웬만한 광산 기술자라면 그 물통의 존재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망할, 나를 짓누르는 생산 목표, 그 숫자놀이에 빠져 안전 선행조치를 게을리했다. 고인들에게 진정한 사죄를 드리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르포나 단편소설로 이 이야기를 써보려 했는데 역량이 부족해 글을 못 쓰다가 이번 시집에 담게 됐다.”

성 소장이 아내에게 바치는 시 ‘숙명처럼 만난 여자’엔 그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실패하고 찾아온 탄광촌/ 4~5년만 하고서 떠나리라 결심했던 광부 일/노동운동에 도의원 생활에 발목이 묶이고/ 진폐재해자들 아픔과 어려움도 외면할 수 없어/ 온몸으로 투쟁한 세월 꼽아보니 30여년”

-연이은 탄광 사망사고에 대책을 요구하다 해고됐고, 복직 투쟁 중인 1991년 민중당 후보로 강원도의원에 당선된 뒤 3선을 했다.

“이 지역에서 나름 조직이 탄탄했던 민중당에서 당원도 아닌 나를 찾아와 출마를 권유했다. 1989년 복직 투쟁 과정에서 단지를 하는 등 지역에서 알려지다 보니 제안을 한 것 같다. 도의원이 뭐하는 건지도 잘 몰랐는데 복직 투쟁에 도움이 될까 해서 승낙을 했다. 당시 민중당에서 40여명을 광역의원선거 후보로 냈는데 다 떨어지고 나 혼자만 당선됐다. 1992년 총선 이후 민중당이 해산되는 바람에 두 번째 선거는 무소속, 세 번째 선거는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치렀다. 첫 도의원 시절 무보수 명예직이라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웠다. 회기와 회기 사이 일자리를 찾다가 중국집 주방에서 접시를 닦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 보도가 되기도 했다. 1994년엔 해고 광부를 도의원으로 뽑아준 탄광촌 주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신장 두개 중 하나를 기증했다. ‘2-1로 얻은 행복’이라는 시에도 썼지만 간절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고 나눌 것이 있을 때 보람과 행복이 훨씬 커진다는 걸 알게 된 계기였다. 2002년 도의원 생활을 마무리했고 2003년부턴 강원랜드 복지재단 상임이사로 일했다. 상임이사에서 물러난 2007년부턴 진폐 재해자를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난해 말 강원도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진폐 재해 심사를 비판했다.

“근로복지공단 소속 병원 의사들이 정밀검진을 거쳐 진폐 장해등급을 판단한 뒤 소견서를 작성한다. 진폐 소견이 나왔는데도 공단 진폐심사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례가 적지 않다. 실태조사를 해보니 병원에서 수차례에 걸쳐 장해등급 판정을 받았는데도 공단 심사에서 무장해 판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정부가 진폐 환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를 해줘야 하는데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시인의 말’에서 5년간 채탄 광부로 일하면서 ‘막장 정신’을 배웠다고 적었다. 막장이라고 하면 대개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데 성 소장이 생각하는 막장 정신은 무엇인가.

“막장은 세상의 끝이자 지옥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독을 품고 배수진을 쳐야 이겨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막장 정신을 배웠기 때문에 광부 생활 이후에도 절박한 마음으로 탄광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여전히 진폐 재해자를 위한 싸움을 벌이고, 시를 쓰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막장 정신과 전태일 정신이 아닐까. 복직 투쟁을 하던 1989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쉼터에서 20여일을 머물게 됐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생활하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쉼터에 누워 벽에 걸린 열사들의 사진을 보면서 전태일 정신의 의미를 되새겼다. 채탄 광부로 일하면서 죽을 뻔한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그런 만큼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를 계속 쓰고 싶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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