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128) 딸아이의 임신, 흥분되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 저는 복덩이예요! 엄마 뱃속에서 잘 자라서 씩씩하게 나갈게요!”

“그래, 착한 아가야 엄마 뱃속에서 편안히 있다 몇 달 후에 우리 건강하게 만나자. 할머니가 꼬까이불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엄마, 감기가 아니라 임신이래! 할머니 될 준비되셨습니까? 하하하.”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128) 딸아이의 임신, 흥분되는 할머니의 꿈

몸살감기인 줄 알고 어제까지 힘들어 했던 딸아이가 임신이라는 희소식을 새해부터 전해준다. 밝은 목소리로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안심되고 순간 울컥했다. 혹여 본인들이 부담될까 묻지도 못하고 늦어지는 임신에 친정엄마로서 마음 졸이던 일이 해결되니 감사하고 기쁠 뿐이다.

“엄마, 애기 사진보고 심장소리 한 번 들어 봐봐. 신기해.”

딸은 노트북을 펼치며 잘 알아볼 수도 없는 부채꼴 화면 속의 움직임과 함께 알 수 없는 파장 속의 태아 심장소리를 들려준다. ‘아! 세상에….’ 생명체의 힘찬 박동 소리가 경이로웠다. 예전엔 초음파 사진을 볼 수 있는 것만도 신기했는데 이제는 개인 컴퓨터에 태아 영상과 그 심장소리까지 입·출력할 수 있다니 과학의 기술이 놀랍고 고마웠다.

4대의 만남 기대하는 시어머님

또한 임산부와 태아는 어떤가. 임산부는 열 달 내내 태아의 동영상을 보며 만나고 심장박동을 들으며 교감할 수 있다니 과연 태어나면서부터 한 살이 되는 이치가 맞는 것 같다. 우리 세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기막힌 광경이다. 나는 증손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어머니께 기쁜 소식을 얼른 전했다. 4대의 만남을 고대하며 상상하던 시어머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어머니, 제가 직접 들었다니까요. 요즘은 의사선생님이 초음파 동영상과 심장소리를 녹음해서 개인 컴퓨터로 보내준대요.” 내가 태아의 힘찬 심장소리를 들었다고 흥분해서 전하자 올해 96세 되신 시어머니는 임신 초기, 형체도 알 수 없는 아이의 심장소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크게 들리던? 아니 그럼 그때부터 뛰는 심장이 평생 뛴다는 말이가?” 어머니의 음성은 내 말을 계속 못미더워하는 눈치다.

“그럼요. 심장이 제일 먼저 생긴대요. 그리곤 줄곧 죽을 때까지 혼자 뛴다잖아요.” 나는 태아의 힘찼던 심장에만 집중하며 더 열을 올려 설명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시어머니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말한다. “저 혼자서 96년을 어떻게 계속 뛸 수 있었간? 그 숱한 세월을… 그나마 옆에 누가 있었으니….” 아마도 시어머니는 그 짧은 순간에 96년의 굴곡진 당신의 심장 속으로 잠시 머물렀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시어머니와 현재 내가 들은 태아의 심장소리에 열중했지만 시어머니는 당신의 파란만장했던 지난 삶 속에서 만난 심장소리들을 듣고 계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96년의 변화무쌍한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순간들과 부딪치며 살아왔다. 그 누군가가 곁에 있어 어려웠던 순간들을 견딜 수 있었고, 또는 그 누군가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처하는 순간들도 있었으리라. 또한 시대적 아픔인 분단 사건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도 오직 자식들과 살아남기만을 바라던 절박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삶을 겪어온 어머니는 심장이 저 혼자 제멋대로 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제야 시어머님의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던 마음들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뒤돌아보면 가슴 벅찼던 순간들도 있었고 절실한 순간에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고 때론 홀로 있는 것 같은 순간들을 버티며 지내왔다. 그러나 오늘도 내 심장은 티도 안내고 여전히 뛰고 있다니 새삼 놀랍다. 나는 미안하게도 내 심장이 뛰고 있다고 특별히 감사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태아의 힘찬 심장소리가 잠든 것 같은 내 심장의 박동과 겹치고 새삼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놀라웠다. 그리곤 잊고 있던 특별한 감동이 내 가슴을 달궜다. 아! 살아 있어서 정말 좋다.

언젠가 손자녀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새해 선물로 힘차게 찾아 올 줄은 몰랐다. 이렇듯 인생은 예상치 않은 순간들로 엮여 가는 것 같다. 많고 많은 아기 중에 우리 가정으로 찾아올 아기가 어떤 녀석일지 궁금했다. 어떤 모습으로 우릴 찾아올까. 한편 그 녀석 또한 수많은 가족들 중에서 우리 딸 내외에게 오다니…. 그 만남이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

소중한 새해 선물로 즐거운 상상

한 세기를 지내온 시어머님 말처럼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옆에 있음으로 행복한 순간들이 많기를 기도한다. 기쁨으로 뛰는 기분 좋은 심장소릴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힘찬 심장을 가진 아이와 이런저런 즐거운 상상에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얼른 보고 싶다.

그러다가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만 있어보자. 예정일이 언제라고 했더라?

산달을 생각하며 나는 이런저런 스케줄을 들여다보았다. 딸애는 그 때가 한창 바쁠 때고, 나 역시 끝내야 할 일과 조정해야 할 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계획했던 일들이 딸의 출산에 즈음해 걸린다. 행복했던 마음이 현실적인 일들로 쿵쿵거린다. 갑자기 딸과 아직 의논도 못해본 육아문제가 머릿속에 휙 스쳐 간다. 나는 멀찍이 있던 남편 팔을 잡아끌었다.

“여보, 얘가 애를 낳으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당신이 왜 지레 걱정해. 자기들이 알아서 애를 잘 키우겠지.”

“아니 일을 계속하려면 누가 도와줘야 애를 키우지.”

“글쎄, 에미 애비가 알아서 하겠지. 믿어봐.”

그래도, 몇 달 후면 불 보듯 뻔한데 뭘 알아서 하겠어. 눈치만 보겠지.”

“행여 당신이 봐준다는 말 하지 마!”

“그래도 가끔씩 봐줘야겠지. 혹시 시부모님이 봐주려나?”

슬쩍 옆으로 밀어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힘차던 태아의 심장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자랄래?” 나는 슬쩍 말을 걸어본다. 딸 내외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세상이 다 바쁜데, 온갖 정성으로 크는 이 아기가 어떻게 자랄까? 아이 하나가 버젓이 자라는데 돈은 또 얼마나 필요한가? 잠깐, 그럼 이 아이는 외동으로 자라나? 외동이면 외로울 텐데 안 되지. 하지만 하나 더 낳으면 이 모든 걱정이 두 배, 세 배…. 오메.

핸드폰으로 녹음해온 아기의 심장소리를 다시 듣는다. 아까는 그 소리가 마치 나를 재촉하는 듯했지만 신기하게 지금은 다시 나를 편안히 다독이며 말을 건넨다.

“할머니! 저는 복덩이예요! 엄마 뱃속에서 잘 자라서 씩씩하게 나갈게요!”

“그래, 착한 아가야 엄마 뱃속에서 편안히 있다 몇 달 후에 우리 건강하게 만나자. 할머니가 꼬까이불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바로 지금, 걱정보다 그 꿈들이 더 현실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