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을 외친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인들의 열악한 창작 환경을 악용해 이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아니한 예술인에게는 재정지원을 배제했다. 유신독재시절의 문화통제를 다시 부활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인이 정치권력·경제권력 등에 저항하고 이를 풍자 또는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창작활동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정권이 지향하는 가치만을 인정하고,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박정희는 1975년 유신을 홍보하기 위해 건전가요 육성, 공연활동 정화 및 퇴폐풍조 일소를 명분으로 해 당시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선도했던 가수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가수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가수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는 이유로 각각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유신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통해 금지곡 선정기준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자학·비관적 내용, 선정·퇴폐적 내용’ 등 자의적인 잣대를 만들어 1975년부터 1976년 1년 동안 771곡에 이르는 대중가요를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심지어 2016년 “미국의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한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 냈다”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저항가수 밥 딜런의 명곡 ‘Blowing in the wind’도 반전곡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이러한 유신정부의 금지곡들은 1987년이 돼서야 비로소 문화공보부의 ‘가요금지곡 해금지침’에 따라 해제됐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법률대응 모임이 1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단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힌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송수근 차관의 ‘영혼 없는 사과’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끝까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인했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 존재를 끝까지 부정하다가 수십 번의 질문 끝에 마지못해 블랙리스트 존재 사실을 시인했다. 조윤선 전 장관이 구속에 이르게 되자, 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고위 관료들은 마지못해 국민들을 향해 영혼 없는 사과를 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사과문을 발표했다. 수장이 구속되는 것으로 모두들 면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과는 하면서도 블랙리스트를 누구의 지시로, 왜 작성했는지,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 자신이 잘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의 영혼 없는 사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 어머니를 향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천연스럽게 말하는 살인범과 다름없다.
송수근 차관은 블랙리스트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문화정책기본법을 개정해 부당한 차별이나 개입을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화정책기본법은 문화예술을 장려하기 위해 문화예술인에게 재정적 지원을 규정하고 있는 법규다. 이러한 복지 관련 법규에 불공정 심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하는 규정을 넣는다는 것은 법체계상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성의 없는 사과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것이다.
문화융성을 외친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인들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창작활동을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을 악용해 예술인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아니한 예술인들에게는 재정지원을 배제해 창작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유신독재시절의 문화통제를 다시 부활한 것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의 기금 지원 배제를 시도한 것은 헌법상 보장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및 예술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직권남용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수집·관리하는 행위로 개인의 자기정보결정권을 침해하는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행위에 해당한다. 우리 선조들이 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국헌 문란행위다. 지금도 이에 분노한 문화예술인들이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있다.
“법과 정의에 반하는 지시 외면해야”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 벨>을 상영한 이후 예산 삭감과 표적 감사 등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됐다. 20년 동안 영화인들의 열정적인 노력과 전 국민의 관심으로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을 거듭하던 부산국제영화제의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문화융성을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제시한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을 모아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아이히만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도망을 다니다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에서 범죄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며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었던 아이히만은 정부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누구보다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공무원들은 그저 윗선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며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혼 없는 행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국헌 문란행위를 야기한 원인이 됐다.
법과 정의에 반하는 지시는 따라서는 안 된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던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닉슨 대통령에게 백악관 집무실에서 나눈 비밀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닉슨 대통령은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미 연방법원이 특별검사의 신청에 따라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할 것을 명령하자, 닉슨은 콕스 특별검사에게 녹음테이프의 서면 요약본을 제출하겠으니 더 이상 다른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콕스 특별검사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자, 닉슨은 법무장관 리처드슨에게 특별검사의 해임을 명령했다. 그러나 법무장관은 명령을 이행하는 대신 사임을 선택했다. 법무장관이 법과 정의에 반하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면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청년 예술가들은 열정페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창작물에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방송·영화음악을 제작하는 로이엔터테인먼트는 젊은 작곡가들에게 월 80만원을 주고 힘들게 창작한 곡들을 방송드라마 크레딧에 한 곡도 창작한 적이 없는 대표이사 김한조 이름으로 발표를 하고 있다. 이들 젊은 작곡가는 유령 작곡가가 된 것이다. 저작재산권은 물론 양도가 금지되는 저작인격권도 탈취해 갔다. 로이엔터테인먼트는 힘들게 방송드라마 배경음악을 작곡한 젊은 작곡가들에게 방송으로 인한 수익금의 액수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청년예술가네크워크와 서울연구원이 2015년 9월 청년 예술가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년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수입으로 월 50만원 미만인 경우가 87%에 달했다. 아예 창작활동으로 얻은 수익이 전혀 없다고 한 청년 예술가도 40%나 됐다. 예술 관련 일자리와 작품 유통과정 등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젊은 예술가는 40%에 달한다고 했다. 젊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열악한 창작여건으로 인해 예술 창작활동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부득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건에서 문화융성이란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이러한 문화예술분야의 불공정을 바로잡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젊은 예술인을 배려하고 지원해 이들이 마음놓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말로만 문화융성을 외치며 실제로는 문화 말살을 위해 문화예술인에게 끊임없이 갑질을 해댔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슈퍼갑이 되어 이권을 챙기고 지원은커녕 자의적인 잣대를 만들어 정권에 거슬리는 문화예술인에게 지원을 배제하는 등 탄압만을 일삼아 왔다. 문화예술인들이 검열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어야만 이 땅에 진정한 문화융성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될 것이다.
<강신하 변호사(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법률대응 모임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