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성희롱’ 맞서니 은밀한 괴롭힘?

장학재단 남도학숙에서 무슨 일이… ‘직장 내 괴롭힘’ 막을 제도 없어

“좀 떨어져서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2014년 9월 장학재단 남도학숙 신입 여직원 ㄱ씨가 근무 중 같은 부서 ㄴ부장에게 던진 말이었다. ㄱ씨는 경력공채를 통해 남도학숙에 입사해 2014년 4월 21일 장학부에 배치됐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공동운영하는 장학재단이다. 광주·전남지역 대학생 860명이 생활한다. ㄴ부장은 입사 첫 달부터 전산입력 방법 등을 문의할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팔을 ㄱ씨의 오른쪽 가슴에 밀착시킨 자세로 컴퓨터 화면과 서류 등을 가리키며 알려줬다. ㄱ씨는 그때마다 불쾌했지만 시보기간이라 불이익을 당할까봐 염려해 말 없이 몸을 옆으로 빼기만 했다. 시보기간이 한 달 남을 때까지 ㄴ부장의 신체접촉이 계속되자 ㄱ씨는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한마디 던졌다. ㄴ부장은 화를 내며 “그러니까 네가 사회생활을 하기 힘든 거야. 엄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응수했다.

이후에도 ㄴ부장의 성희롱은 계속됐다고 ㄱ씨는 주장했다. 2015년 1월 한 학생이 장학부 직원들에게 핫팩을 선물하자 ㄴ부장은 ㄱ씨에게 사용법을 물었다. “(핫팩은) 흔들면 따뜻해진다”고 설명해주자 ㄴ부장은 ㄱ씨의 가슴을 쳐다보며 “손에 들고 다니지 말고 가슴에 꼭 품고 다녀라. 그래야 더 따뜻하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 발언에 수치심을 느꼈다.

같은 해 4월 30일 ㄱ씨는 ㄴ부장과의 면담자리에 불려갔다. 일주일 전 있었던 전 직원 춘계야유회 뒤풀이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김완기 원장, 이점관 사무처장 등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ㄴ부장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ㄱ씨에게 원장 옆으로 가서 고기를 굽고 술잔이 비면 계속 따라줄 것을 지시했다. ㄱ씨는 “회식자리에 저를 불러 술 시중, 음식 시중을 들게 하는 행위를 멈춰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라고 ㄴ부장에게 문자로 요청했다. 이때도 돌아온 답변은 “너 참 이상하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이렇게 다 이야기하니?”였다. “제가 술집여자입니까? 왜 제가 그 옆자리에 가서 앉아 있어야만 합니까?” “자기가 그렇게 행실하면 술집여자지.” ㄱ씨는 ‘술집여자’ 발언에 사과 등을 요구했으나 “탄원서 써, 탄원서” 등의 비아냥을 들었다. ㄱ씨는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이 같은 내용을 담아 진정을 제기했다. 이상은 인권위 결정문에 담긴 ㄱ씨의 주장을 재구성한 것이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 건물. 15일 부터 사내 성희롱 및 후속조치 관련 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관련자 ‘분리조치’ 내세워 독방근무 조치
인권위 조사는 7월부터 시작됐다. 지난 3월 약 9개월 걸친 조사 끝에 세 가지 사안 중 두 가지만 성희롱으로 인정했다. ‘핫팩사건’의 경우 ㄴ부장은 “가슴에 품고 다녀라”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적인 의미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따뜻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고 진술했다. 인권위는 손에 쥐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핫팩을 굳이 가슴과 연결시킨 것은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술집여자’ 발언도 성희롱으로 인정됐다. ㄴ부장은 회식과 관련해서는 ㄱ씨가 통로 가까이에 있기에 자리를 정리하려는 차원에서 창가로 오라고 했던 것이지 술 시중을 지시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남도학숙 직원들도 인권위 조사에서 ㄱ씨는 실제로 고기를 굽거나 술 시중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ㄴ부장의 발언은 ㄱ씨의 녹취로 증거가 남아 있었다. ㄴ부장은 발언과 관련해서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ㄱ씨가 평소 근무태도에 문제가 있었고, 상사에게 대들고 따지는 행동을 했으니 행실을 바르게 하라고 한 적은 있지만, ‘ㄱ씨가 술집여자’라는 의미로 말한 기억은 없다고 해명했다. 남도학숙은 이 발언에 대해 충분히 면담을 갖고 사무처장이 ‘성희롱은 피해자 입장이 고려돼야 한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해 둘은 화해했다고 진술했다. 인권위는 여성에게 접대의 역할을 맡기는 한국의 회식문화, 권위주의적인 직장문화 등을 고려해 ‘술집여자 발언’은 성희롱이 맞다고 판단했다.

근무 중 신체접촉은 성희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 번 마우스를 잡다가 손등을 스친 적은 있다”는 ㄴ부장의 말이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팔과 가슴을 밀착시켰다는 진술에는 증거가 없었다. ㄴ부장은 장학부 사무실은 전면 유리로 돼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어 무리한 신체접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ㄱ씨의 근무태도가 불량해 ㄴ부장이 인사를 요구했다는 다른 직원들의 진술도 있었다. 장학부 사무실은 서울 대방동 남도학숙 본관 건물 1층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인다. 전면 유리로 돼 있으나 유리 가운데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블러 처리가 돼 있고 칸막이도 있었다.

인권위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김완기 남도학숙 원장에게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ㄴ씨를 다른 부서로 분리조치시킬 것을 요구했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에 있지 않도록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ㄴ부장 대신 ㄱ씨가 과거 사무실로 쓰이지 않던 사무실에서 독방 근무를 했다. 출입문과 컴퓨터실, 도서관 사이에 위치한 사무실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장학부 건물과 마찬가지로 외벽이 유리로 돼 있었다. 남도학숙에 거주하는 한 학생은 “원래 가끔 상담실로나 활용될 뿐 평소 쓰이지 않던 방인데, ㄱ선생님이 근무하 고 있어 의아했다”고 말했다. 남도학숙 관계자는 <주간경향>과의 해명에서 “인권위가 요구한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의 원칙을 따른 것이지,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2014년 11월 서울 세종문화 회관 앞에서 한·일 청년 운동가들이 블랙기업 선포식을 열고 있다.

지난해 11월 전남도의회 안전행정환경위원회에서 열린 행정사무감사에서 성희롱 사건이 보고됐다. 김완기 원장은 이 자리에서 “전혀 그럴 일이 없는데 여직원이 부장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진정했다”며 “성희롱이 아닌 하극상이다. 신참 직원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순화되지 않은 표현을 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진정을 해 학숙 명예를 훼손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원만한 운영을 위해 여직원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성이 불량한 여자가 잘못 들어온 케이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과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이 발언은 조용히 묻혔다가 4월 15일 <중앙일보> 보도로 알려졌다.

인권위 결정에 지역 여성단체 반발
인권위는 3월 29일 결정문에서 성희롱 사건 중 일부를 사실로 인정하며 전 직원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진정 이후에 벌어진 ㄱ씨의 독방 근무에 대해서는 결정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고소나 소송 등을 통한 ㄴ부장이나 남도학숙에 대한 문제제기는 별도로 하지 않아, 하려면 ㄱ씨가 개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인권위 결정 이후 남도학숙은 인사위원회를 열고 ㄴ부장을 직위해제한 뒤 감봉 1개월의 추가 징계를 내렸다. ㄱ씨는 ㄴ부장을 제외하고 다른 부서원들이 거의 그대로인 사무실로 복귀했다.

광주·전남지역 여성단체는 반발했다. 징계 수위가 낮고 성희롱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조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은 지난 6일 성명을 발표해 “이 사건은 성희롱 피해가 지속적으로 진행됐고, 피해자가 수차례 피해사실을 동료와 원장에게 알렸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를 따돌리는 등 조직의 문화에 문제가 있다”며 “광주시와 전남도는 남도학숙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 제2의 피해가 있었는지, 기관 측의 성희롱 대처는 적절했는지, 다른 인권침해 사실은 없었는지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15일 남도학숙에 대한 감사가 시작됐다. 광주시는 청년정책육성과 직원 1명과 감사실 직원 2명을 파견했다. 직원 대상 인권교육도 이날 실시됐다.

그러나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 회의적이다. 김 원장의 ‘하극상 발언’에서 보이듯 남도학숙 내 성희롱 사건은 여성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조직문화와 연관돼 있다. 인권위 결정문에는 남도학숙이나 관리·감독기관인 광주시, 전남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남도학숙 내 성희롱 문제는 한국의 회식문화, 유흥문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했지만, ㄱ씨(진정인)와 ㄴ부장(피진정인) 간 벌어진 일로만 간주한다. 지역사회에서 권위 있는 위치인 조직의 수장이 성희롱보다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를 더 비난하는 상황에서 1회적 인권교육을 한다고 조직문화가 달라지거나 의식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현직 직원들의 말이다. 두 사람 간 관계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방관이 관련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접근해야 문제가 풀린다.

ㄱ씨가 혼자 근무했던 학숙 내 출입문 옆 독방. 외벽의 3분의 2 이상이 유리로 돼 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내 괴롭힘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도
직장 내 괴롭힘을 막을 제도는 국내에서 마련돼 있지 않다. 5월 말 임기가 종료되는 19대 국회에는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안이 2건 발의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2013년 9월 직장 내 괴롭힘 예방교육을 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이인영 의원도 직장 내 괴롭힘을 막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두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19대 국회와 더불어 폐기될 전망에 처해 있다. 국회 환노위는 법 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하나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이 불명확해 노동현장에서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크고, 신체적·정신적 폭력이 심각한 경우에는 형법과 근로기준법 등 일반 법·제도를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직장 현실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과거 아르바이트생에게 집중되던 ‘직장 내 괴롭힘’ 문화는 최근에는 인턴사원, 신입(정)사원 등으로 올라오는 추세지만 (근로기준법 위반이 명백한 임금체불 문제 등과 달리) 법안 근거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고,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요건으로도 명시돼 있지 않다. 노동문제에서 ‘사내 괴롭힘’ 문제는 완벽한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 싸우려면 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대부분은 싸우는 과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만두라’고 권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2014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정규직 전환 2년간 성추행을 견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26세 여직원의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CJ제일제당 인턴사원이 실적 압박과 사내 괴롭힘 등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사례가 발생했다.(박스기사 참조)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지난해 6월 조합원 3065명에게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8.8%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15년도 11월 전라남도 도의회 행정사무감사 회의록

‘직장 내 괴롭힘’으로 경제적 손실까지
직장 내 괴롭힘은 경제적 손실까지 입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서유정 부연구위원의 ‘직종별 직장 내 괴롭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는 하루 평균 88.9분의 노동시간 손실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시간 손실을 직종별 평균임금에 대입해 추산한 단순 인건비 손실만도 수천억원대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연간 인건비 손실비용은 종사자 숫자가 많고 평균임금이 높은 정부부처·공기업(8219억원)이 압도적이었다. IT서비스 업종(3965억원), 철강(3498억원) 등에서도 높게 나타났다. 이어 금융보험(2574억원), 간호사(1854억원), 전자(1454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에서 활동하는 이종희 변호사는 “근로계약을 맺으면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문화가 있다”며 “회사에 대한 문제제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김완기 남도학숙 원장의 ‘하극상’ 발언이 단적인 예다. 이 변호사는 “성희롱 등의 경우는 사후적으로 피해를 인정받고 구제받는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은밀한 방식의 괴롭힘과 따돌림이 일어나기 쉽다”며 “직장 내 괴롭힘은 ‘괴롭힘’이 무엇인지 충분히 기준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다양한 괴롭힘 사례를 수집하고 근로계약은 인격적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리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숙 직원들에게 인권교육만을 권고한 인권위 결정이 아쉽다는 취지다. 남도학숙이 공공기관인 만큼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식의 문제제기도 가능했다고 이 변호사는 덧붙였다.

15일 남도학숙에서 만난 황치열 광주시 감사실 주무관은 “원장도 조사대상에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누구를 뺄 수 있겠는가. 다 해당된다”며 “조사 초기단계라 감사 내용은 아직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남도학숙에서 경력직 신입 여직원을 대상으로 벌어진 성희롱과 후속조치가 ‘하극상’인지 ‘문제’인지에 대한 판단은 광주시의 손으로 넘어갔다.

직장내 괴롭힘, 법은 멀고 가이드라인은 가깝다

직장 내 괴롭힘을 법률로 규제하는 국가는 캐나다·호주·프랑스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2002년 근로기준법과 별개로 노동법전에 직장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조문을 포함시켰다. 직장내 괴롭힘을 노동자의 정신적·육체적 건강보장 의무 위반으로 보고, 사업주 본인이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책임지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도 2003년 이후 캘리포니아, 뉴저지, 뉴욕 등 13개 주에서 ‘반따돌림법’(anti-bulying)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2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가이드라인(행정지침)을 제정했다. 일본 정부의 가이드라인에는 질책이나 험담을 포함한 언어폭력, 인사권 남용, 성희롱, 과도한 업무 할당, 퇴직 강요뿐 아니라 인사를 안 받는 행위, 얼굴을 보지 않고 e메일로만 업무를 지시하는 행위등 다양한 따돌림 양태를 언급했다. 일본에서는 노동자를 1회용처럼 쓰고 버리는 ‘블랙기업’이라는 말이 만들어 졌다. ‘블랙기업’이란 말을 만들어낸 일본의 시민운동가 곤노 하루니는 “직장내 괴롭힘 문제는 일본형 고용관행과 관련이 크다”고 내다봤다.

과거 일본 기업은 종업원들을 종신고용하는 대가로 회사와 상사의 명령권을 절대화해 회사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회사인간’을 양산했다. 1990년대 이후 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종신고용은 사라진 반면 명령권의 강도는 약화되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의 힘은 상실된 반면 다양한 괴롭힘만 남은 ‘블랙기업’이 만들어졌다고 저서 <블랙기업-일본을 파괴하는 요괴>에서 설명한다.

일본과 유사한 한국의 노동구조에서는 법보다 의식구조의 변화과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하지만 의식구조가 바뀌려면 공공기관의 노력이 필요하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차별철폐 집행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도 개인들은 근거가 없으면 대응하기 어렵다. 반면 정부는 저성과자 퇴출이 가능하도록 한 해고요건 완화 지침을 만들면서 성과 관리를 통한 압박이 정당화된다는 정반대의 신호를 보냈다”고 말했다. 김 집행위원은 “당당 법을 만들기가 어렵다면 고용노동부 지역노동청 차원에서라도 실태조사를 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개별 사업장에서 최소한의 문제제기를 할 근거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시난해 9월 ‘비정규직 직장 괴롭힘 예방지침’을 만들면서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이란 “직장 내 우위를 바탕으로 업무의 적정한 범위를 넘어 노동자에게 정신적·정서적·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환경을 악화시키거나, 노동자의 인격과 존엄을 침해하는 일체의 행위”이다.

죽음 부르는 ‘한국형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직장에서 쓰고 버려졌다는 ‘배신감’,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고립감’이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2014년 9월 26일 중소기업중앙회 계약직 직원 권모씨(당시 26세)는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계약 해지를 당한 뒤 한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인은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2012년 계약직으로 입사해 2년 동안 7차례(3개월-6개월-2개월-3개월-2개월-3개월-2개월) 계약과 해지를 반복했다. 유서에는 기업 관계자들에게 지속적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유서에는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다”며 “최선을 다하고 정을 쏟으며 미래를 그려 나갔던 경험들이 날 배신하는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내 에너지들이 산산조각나는 것 같다”고 유서에 울분을 토했다.

2014년 1월 CJ제일제당 충북 진천공장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고교생 김모군(19)이 자살했다. 김군은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청년인턴제를 통해 입사했다. 설 대목을 앞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초과근무에 시달렸으며, 입사 이후 선배들이 술·담배를 강권하고 회식자리에서 ‘원산폭격’ 등 기합을 주며 괴롭혔다고 유족들은 주장했다.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진행되는 강압적 노무관리도 ‘한국형 괴롭힘’으로 꼽힌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달 22일 현대자동차 엔진부품 생산업체인 유성기업 아산공장 직원 김모씨(39)의 정신질환 ‘중증의 우울병 에피소드’를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지난해 충남노동인권센터 심리치유사업단 ‘두리공감’이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아산ㆍ영동) 조합원 268명을 상대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한 결과 43.3%가 우울장애 고위험군이었다. 두리공감 측은 2011년 사측의 직장 폐쇄와 지금까지 지속된 노사갈등이 우울증의 영향인 것으로 보고 있다. 금속노조는 지난달 17일 목숨을 끊은 유성기업 영동지회 소속 한모 조합원(42)의 죽음 역시 장기간 이어진 노사갈등 과정에서 받아온 극심한 스트레스와 연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