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스포츠 뛰어들자 방송3사 ‘흔들흔들’… “세계적인 흐름” VS “볼 권리 침해”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방송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진 스포츠 팬이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아나운서의 말 한마디에는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케이블TV에 스포츠 전문 채널이 생긴 후에는 발길을 돌릴 곳이라도 생겨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지만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방송사의 횡포는 시청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4월 한국농구연맹(KBL)의 경기일정이 도마에 올랐다. KBL은 TG삼보와 KCC의 챔피언결정전 가운데 3차전과 6차전을 제외한 평일 경기의 시작시간을 6시로 1시간 앞당겼다. 방송사의 중계시간을 고려한 조정이었다. “평일날 오후 6시에 맞춰 경기장에 나올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되겠냐”는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정규시즌에도 파행은 계속되던 터였다. 저녁 7시로 예정된 금요일 경기는 오후 3시로 옮겨졌다. 방송사의 중계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한 ‘임의 조정’이었다.
중계시간 따라 고무줄 일정
KBL이 지상파 방송국의 요청에 따라 경기시간을 바꾸는 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다. KBL 마케팅팀 신영락 팀장은 “중계가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타이틀스폰서의 협찬금액이 달라지기 때문에 방송사의 편성시간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말 그대로 ‘약한 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셈이다.
KBL을 비롯해 한국야구위원회(KBO), 한국프로축구연맹 등 대개의 프로스포츠 단체는 중계권료와 타이틀스폰서의 협찬금으로 운영비를 충당한다. 구조적으로 중계권료를 지불하는 지상파 방송국들의 입김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게다가 타이틀스폰서를 맡은 기업은 노출빈도로 협찬효과를 따지는데 지상파를 가장 높게 평가한다. 상황이 이러니 ‘팬서비스’는 2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스폰서들은 지상파를 선호하지만 지상파 방송사의 스포츠 편성비율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방송사들이 국내 프로스포츠 경기의 중계권을 사들이고도 시청률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중계를 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난 시즌 프로농구 경기 가운데 지상파 방송이 중계한 시합은 모두 18경기로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4강전까지를 합한 전체 281경기의 6.4%에 불과했다. 프로농구보다 팬층이 두터운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지상파 방송에서 찾아보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BS를 주간방송사로 선정하고 2001년부터 5년간 프로축구 K-리그의 독점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하이라이트 프로그램까지 포함해 1년에 30경기 이상 중계한다는 단서가 붙은 계약이었다. 그러나 실제 방송된 경기는 매년 30회를 간신히 넘었고 지난해에는 이 약속마저 지키지 못했다.
“스포츠 중계 수지타산 안맞아”
지난해까지 KBS를 주간방송사로 선정해 중계권 계약을 했던 KBO는 올해 방송사들과 개별계약으로 선회하면서 계약서에서 의무 중계횟수 관련 조항을 아예 없애버렸다. 지키지도 않을 유명무실한 조항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프로야구는 지상파에서 모두 17번 중계방송됐다. 의무 중계횟수인 30회에 한참 모자라는 수치다.
지상파 방송사도 할 말은 있다. 각종 프로스포츠 경기가 시작되는 시각은 대체로 오후 6시, 즉 황금시간대다. 광고시장이 침체된 상황에 스포츠 중계로 수지타산을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KBS 스포츠제작팀 이동현 팀장은 “같은 시간대 오락프로그램에 비해 스포츠 중계는 광고수주 등의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방송3사의 독주체제는 사실상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신생 스포츠마케팅 회사인 IB스포츠가 굵직굵직한 중계권 협상을 따내면서 ‘절대권력’이 흔들리고 있다. 첫 신호탄은 메이저리그 중계권. IB스포츠는 2005년부터 4년간 메이저리그 국내 중계권을 사들였다. 방송3사가 지상파와 자회사인 스포츠채널의 중계권만을 사오던 것과는 달리 ‘다음’에서 먼저 확보한 인터넷방송을 제외한 DMB, IPTV 등 각종 뉴미디어에 대한 중계권까지 포함된 계약이었다. 방송3사는 드러내고 반발은 못했지만 IB스포츠를 ‘왕따’하기로 모종의 담합까지 하면서 조용히 공동대응에 나섰다(박스기사 참조).
당연히 중계권 재구매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방송3사는 IB스포츠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사온만큼 중계권 재판매 금액은 당연히 비싸질 것이라며 선수를 쳤다. 스포츠뉴스에서도 메이저리그 소식은 화면 없이 자막으로만 처리했다. 일부에서는 IB스포츠측이 보도용 자료화면은 무상으로 제공하는 통상적인 관행마저 무시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IB스포츠측의 설명은 다르다. 해외사업팀 조용노 부장은 “보도용 자료화면을 제공해달라는 요청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었는데 악의적인 소문만 떠돈다”며 “보도자료를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협상 자체가 어려워지자 IB스포츠는 자체 채널(엑스포츠·XportsTV)을 확보하고 4월부터 직접 방송에 나서는 한편 위성DMB사업자인 TU미디어와 케이블PP인 수퍼액션과 메이저리그 중계권 공급계약을 맺었다.
지상파의 우려와 달리 IB스포츠의 메이저리그 중계권 재판매 금액도 상식적인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IB스포츠와 메이저리그 중계권 재구매 협상을 했던 한 관계자는 “계약내용을 밝히면 안 된다는 조항 때문에 구체적인 금액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상식적인 수준이다”라면서 “방송3사도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통해 직접 구매하는 것보다 금액적으로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협상은 없이 감정만 날카롭게
그러나 IB스포츠가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매체에 중계권을 재판매할 수 있는 권리까지 확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체의 균형발전 차원에서 지상파 위주의 중계권 협상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방송3사의 ‘코리안 풀’은 지상파와 계열 스포츠채널의 중계권만 구매했기 때문에 인터넷방송이나 DMB 등 다른 매체의 접근은 원천적으로 봉쇄됐던 까닭이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방송3사가 꺼내든 대응 카드는 ‘보편적 접근성(Universal Access)’이라는 개념이다. “IB스포츠가 중계권을 확보함으로써 유료방송인 케이블TV를 통해서만 국가적인 스포츠경기를 보게 됐으니 시청자들은 볼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방송3사의 주장이다. 방송3사는 방송위원회에 ‘보편적 접근성’의 명문화를 요구하는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케이블TV 가입자수가 1300만 가구를 넘어 지상파 가시청 가구수의 85%에 육박하고, 시청자 대부분이 지상파도 케이블TV를 통해 재수신하고 있는 상황에 지상파만이 보편적인 매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IB스포츠는 “방송3사가 중계권 재판매에 대한 협상은 한번도 하지 않은 채 지레짐작만으로 너무 앞서 나간다”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조용노 부장은 “IB스포츠가 계약을 완료한 시점이 지난 4월말이고 5월에는 계약금까지 송금한 상태로 계약이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다”면서 ‘제3의 힘’에 의지해 강제조정하려는 방송3사의 대응방식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최악의 상황’ 가능성은 적어
각 방송사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IB스포츠를 옹호하는 글이 훨씬 많아 방송사들의 주장을 무색케한다. 심지어 “엑스포츠가 지상파가 아니라서 문제가 된다면 엑스포츠를 지상파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지금까지 국내 스포츠 중계를 홀대하던 방송3사의 새삼스러운 주장에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방송업계의 한 인사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나 AFC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언제까지 ‘코리안 풀’을 인정하며 끌려다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기존 질서가 바뀌면서 당장은 혼란을 겪겠지만 세계적인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고 말했다.
IB스포츠는 추이를 지켜보며 방송3사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송3사 역시 중계권 재구매와 관련된 협상 테이블이 마련된다면 적극적으로 임할 방침이어서 스포츠팬들의 가슴을 죄게 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지금은 언론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주장을 확인하는 등 모든 대화 채널을 닫아놓은 상태라 언제 협상이 시작될지는 미지수다.
한편 국내 프로스포츠를 주관하고 있는 단체들은 IB스포츠의 등장이 지상파 위주의 관행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지상파 중계방송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제안이라면 IB스포츠와의 협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KBO 홍보팀 문정균 대리는 “현재 스포츠 전문 채널이 3개여서 항상 1경기는 중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중계권과 관련된 제안이 들어온다면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의향이 있다”며 관심을 나타냈다.
엑스포츠 ‘대박’에 배아픈 MBC
‘박찬호 성적따라 울다가 웃다가.’
올해로 9년을 맞은 메이저리그 중계 역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 정도가 아닐가 싶다. 이 기간에 중계권료는 무료 40배나 폭등했다. 그러나 최초 중계권료 가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헐값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폭등’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어 보인다.
1997년 메이저리거 박찬호 경기의 중계권료는 30만 달러. KBS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기량이 절정에 오른 박찬호는 14승을 챙겼고 KBS도 덩달아 짭짤한 재미를 봤다. KBS의 메이저리그 중계가 ‘알짜배기’로 판명되자 다른 방송사들도 앞다퉈 메이저리그 중계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혼전이 거듭되더니 이듬해 메이저리그 중계권은 경인방송(iTV)이 가져갔다. 금액은 이전해의 3배가 넘는 100만 달러였다. 방송3사의 견제 속에 서울 진입의 돌파구를 찾던 iTV가 찾아낸 묘수가 박찬호 경기 중계였다. iTV는 1999년·2000년에도 각각 150만 달러와 300만 달러를 지불하며 중계권 수성에 성공했다.
절치부심 기회를 엿보고 있던 MBC는 2001년 반격을 시작했다. 무려 3200만 달러를 투자해 2004년까지의 중계권을 확보했다. 1300원에 가까웠던 당시 환율을 감안한다면 MBC의 투자금액은 이번에 IB스포츠가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사들이는데 쓴 금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당연히 외화낭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더욱이 당시 KBS와 MBC·SBS등 방송3사가 공동 테이블을 구성해 협상에 나서기로 했던 터라 파장은 더 컸다. MBC는 단숨에 한국 스포츠계의 물을 흐린 ‘문제아’로 낙인찍혔고 KBS는 국내 스포츠 중계권을 독점하는 것으로 독기를 품었다.
그러나 MBC의 돌출행동은 자충수가 됐다. 박찬호가 부상과 잇단 부진을 겪으면서 시청률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박찬호 약발이 먹혀들지 않으면서 MBC는 수백억원의 손실만 기록한 채 쓸쓸히 손을 털어야 했다.
반면 올해부터 메이저리그 중계권 계약을 따낸 IB스포츠는 박찬호의 화려한 부활과 김병헌·서재응·김선우·최희섭 등 후발주자들의 약진으로 표정관리가 힘들 정도다. 메이저리그 중계를 내보내고 있는 IB스포츠의 자회사 엑스포츠는 지난 6월 한달 광고매출이 15억원을 기록했을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추세라면 광고수익만으로 중계꿘료를 충당하고도 남는 대박이 기대된다.
메이저리그 중계방송의 후광은 이것뿐이 아니다. 엑스포츠는 케이블TV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며 기염을 토하는 중이다. 방송을 시작한 지 석달만에 가입자수 1100만 가구를 눈앞에 뒀다. 관련업계가 ‘기적’으로 표현할 정도의 놀라운 성과다. ‘도원결의’를 개뜨리고 나섰던 MBC가 IB스포츠의 성공에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다.
박찬호와 얽힌 인연은 지난 6월 또 한차례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박찬호의 통산 100승 경기를 생중계하기 위해 부산방송(PSB)이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재구매하기로 결정한 것이 발단이었다. MBC스포츠국의 모 간부가 “중계권 시장을 교란시킨 IB스포츠와는 거래하지 말라”는 요청을 했고 PSB는 원래대로 박찬호의 통산 100승 경기를 내보냈다.
PSB 편성팀 곽경익 팀장은 “야구팬이 특히 많은 부산·경남지역의 민영방송으로서 예산이 확보된다면 메이저리그 중계를 고정편성하고 싶다”면서 “국내 프로야구 중계는 저녁시간대에 편성되기 때문에 오전시간을 활용하는 메이저리그 중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