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추석 이어 국제 곡물가 급등 ‘악재 산재’…애그플레이션 우려 확산
먹거리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집중호우 여파로 농축산물 가격이 크게 올랐다. 휴가철, 추석 등 수요와 맞물려 가격은 더 오를 수 있다.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파기 등으로 국제 곡물 가격도 뛰고 있다. 시차를 두고 우리 장바구니 물가를 자극할 공산이 크다. 농산물 물가 상승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리는 ‘애그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농축산품 가격, 얼마나 올랐나
집중호우로 채소류 중심의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 7월 26일 기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를 보면, 적상추 4㎏당 도매가격은 평균 7만3740원으로 한 달 전인 4주 전(1만9740원)보다 273.6% 급등했다. 같은 기간 시금치는 4㎏당 평균 1만8596원에서 5만2000만원으로 179.6%, 얼갈이배추는 4㎏당 평균 7512원에서 1만4060원으로 87.2% 급등했다. 애호박(117.2%)과 깻잎(112.9%)도 크게 올랐다.
공사가 발표한 7월 셋째 주(7월 17~22일) 주간동향에서도 채소류 도매가격은 급등한 것으로 확인된다. 무(1개) 평균 도매가격은 한 주 전 1092원에서 1409원으로 29.0% 올랐고, 양파(원/kg)는 1367원에서 1474원으로 7.8% 올랐다.
가락시장 주요 품목별 주간동향(7월 셋째 주)도 마찬가지다. 28개 품목 중 애호박, 백다다기오이, 청양고추, 대추방울토마토, 상추(포기찹), 양상추, 대파, 열무, 무, 배추, 복숭아(백도), 사과(부사), 감자(수미), 양파, 포도(캠벨얼리) 등 15개 품목이 한 주 전보다 가격이 올랐다. 바나나(수입), 당근, 밤고구마, 찰옥수수 등 8개 품목은 5% 안팎 수준에서 보합을 보였다. 자두(대석), 새송이버섯, 복숭아(천도), 양배추, 물오징어 등 5개 품목은 전주 대비 하락했다. 전체 물량으로 보면, 반입량은 전주 대비 24% 감소하고, 평균가격(2만4968원)은 전주(1만3805원) 대비 97% 상승했다. 동향 보고서는 7월 넷째 주에도 충청지역 비 피해, 경기지역 햇 물량 일조량 부족에 의한 생장 지연으로 반입량이 감소하며 시세가 전주 대비 강보합세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호우로 인한 침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7월 26일 기준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따르면 사유시설 피해는 3940건(충북 1829, 충남 946, 전북 474, 경북 470 등), 공공시설 피해는 8416건(충북 3649, 경북 2080, 충남 1725, 세종 304, 전북 301 등)이다. 농작물 침수나 낙과 피해 규모는 서울 넓이(6만524ha)의 절반이 넘는 3만6252㏊(1㏊=1만㎡)다. 닭과 오리 등 폐사한 가축은 92만9000마리로 집계됐다.
돼지고기 가격도 뛸 조짐을 보인다. 한국소비자원 참가격이 공개한 7월 셋째 주 돼지고기 목살(100g)과 삼겹살(100g)의 유통업체 평균 판매가격이 각각 3704원, 3853원으로 2주 전에 비해 4.5%, 7.1% 상승했다.
장마가 물러간 뒤엔 폭염 피해가 우려된다. 한국물가정보 이동훈 선임연구원은 “이번 집중호우로 상추, 깻잎, 시금치 등과 같은 엽채류 채소가 큰 피해를 입었고 가격도 크게 뛰었다. 이젠 폭염이 기승을 부릴 텐데 집중호우 뒤에 따라오는 폭염으로 잎채소류 이파리가 타거나 녹아내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해 출하량이 급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먹거리 수요가 커지는 휴가철과 9월 말을 전후해 가격은 더 오를 여지가 크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난해엔 8월 집중호우, 9월 초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 힌남노 등으로 대규모 낙과 피해가 발생해 제수용 과일 출하량이 급감했다”며 “올해도 집중호우와 폭염 등으로 피해가 커지면 출하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휴가철과 추석 수요까지 겹치면 농축산물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곡물가 급등 등 악재 산적
집중호우와 폭염, 수요 증가 등이 농축산물 가격 변동성을 키우는 대내 요인이라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대표적인 대외 요인이다. 전쟁 이후 올해 들어 안정세를 보이던 국제 곡물 가격이 7월 17일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참여 중단 선언 이후 치솟는 분위기다. 흑해곡물협정은 튀르키예와 유엔의 중재로 지난해 7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맺은 협정이다. 전쟁 중에도 흑해를 통해 곡물과 비료를 수출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 3차례 연장됐지만, 러시아가 4번째 기한 연장을 앞두고 파기했다.
러시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항구도시 오데사를 공격해 세계식량안보 우려를 키우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 중 한 곳이다. 흑해 항로가 막히면 우크라이나의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 출하도 차질을 빚게 된다.
러시아는 7월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다뉴브강의 항구도시인 오데사주 레니의 곡물창고들을 공격했다. 하루 뒤인 25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선물시장에서 밀 가격은 부셸(곡물 중량 단위·1부셸=27.2㎏)당 7.7달러에 거래됐다. 지난 2월 21일 이후 5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협정 파기 선언 당일인 7월 17일 밀 선물 가격은 부셸당 6.5달러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해외곡물시장정보(7월 25일자)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올레 키퍼 오데사 주지사는 7월 24일 우크라이나 방송에 출연해 “러시아는 우리 곡물 수출을 완전히 차단하고, 세계를 굶주리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곡물 가격은 더 오르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7월 2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피에르-올리비에르 고린차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흑해 곡물협정이 우크라이나로부터 충분한 곡물 공급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협정이 중단되면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흑해 곡물협정 중단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10~15% 오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후이상에 따른 작황 부진 여파로 주요 곡물 생산국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도 곡물 가격 변동성을 키울 것으로 전망된다. 로이터통신의 7월 21일 보도를 보면, 인도 상무부는 하루 전날 자국 전체 쌀 수출의 45% 정도를 차지하는 쌀(바스타미 품종이 아닌 흰쌀)의 수출을 즉시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쌀 최대 수출국 인도는 지난해 전체 쌀 수출량(2200만t)의 45%인 1000만t 정도를 전 세계에 수출했다.
국제 곡물 가격 급등은 사룟값 등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만큼 축산농가 부담이 커지게 된다. 김종진 농촌경제연구원 FTA이행지원센터장은 “국제 곡물은 국내 수입업체가 선물 계약을 맺어 구매하기 때문에 가격 변동 폭은 대략 3~6개월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반영된다. 이런 구조에서 공동구매 방식으로 구매하는 사료업체는 원재료 가격 인상폭을 비교적 발 빠르게 반영해 시중에 판매한다.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더라도 크게 손해를 보는 구조는 아니다. 하지만 축산농가는 사정이 다르다. 통상 축산농가 생산비 중 사룟값 비중이 50~60%를 차지한다. 이들이 소나 돼지를 팔 때 가격은 국제 곡물 가격 흐름과 무관하게 시장의 수급 사이클에 따라 형성된다. 사룟값이 올랐다고 해서 비싼 가격에 가축을 팔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란 의미다.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면 생산비 부담이 늘면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적인 이상 기후 등으로 생산비 부담을 호소하는 축산농가는 우유 원유 가격 인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농가의 생산비는 전년 대비 13.7% 상승했다. 전체 생산비 중 사룟값 비중이 59.5%였다. 생산비 등을 원유 가격에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난해 원윳값이 각각 55%, 37% 상승했다. 농식품부는 7월 25일 보도자료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적인 이상기후 등으로 사료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며 “낙농가가 1년 이상 생산비 급등을 감내하다 보니 목장 경영을 포기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등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곡물과 설탕 등 국제 곡물 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향후 빵과 라면,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 가격도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매월 발표하는 설탕 가격 지수는 지난 6월 152.2로 집계됐다. 한 달 전(5월 157.2)에 비해 다소 낮아졌지만, 올해 1월 116.8에 비하면 30.3% 오른 상태다.
애그플레이션 우려 커지는 이유
정부는 최근까지도 국내 소비자 물가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다. 21개월 만에 2%대 물가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7월 4일 ‘2023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브리핑’에서 “지난해 6.3%(7월)까지 상승하던 소비자 물가가 올해 6월 2.7%로 하락했다. 생활물가도 2.3%로 27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하면서 물가 상승세는 확연히 둔화하는 모습”이라며 “한국 경제가 지난 1년간 힘든 시기를 지나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지점에 왔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이날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3.5%에서 3.3%로 소폭 하향 조정하면서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하반기 물가는 평균 2% 중후반대 수준에서 안정세를 보일 것”으로 봤다.
앞서 이날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6월 소비자 물가 동향’을 보면 지난 6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2.7% 올랐다. 물가상승률이 2%대로 둔화한 것은 2021년 9월(2.4%) 이후 21개월 만이다. 석유류 가격이 하락한 영향이 컸고, 지난해 6월(6.0%) 큰 폭으로 치솟은 데 따른 기저효과도 작용했다.
국내외 기관의 전망은 그러나 기재부의 낙관적인 전망과 온도차를 보인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7월 13일 기준금리를 3.50%로 동결하면서 “물가상승률이 둔화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만 8월 이후 다시 3% 내외로 높아지는 등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금통위 통화정책 방향 회의 의결문을 보면 7월까지는 물가가 둔화 흐름을 이어가겠지만, 8월 이후 다시 높아져 연말까지 3% 내외에서 등락하면서 최종적으로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5월 전망치(3.5%)에 부합할 것으로 봤다.
현대경제연구원도 7월 26일 ‘한국 경제의 다섯 가지 모나리자 모호성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소비자물가지수는 2020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전 품목이 평균적으로 10% 이상 상승해 있는 상황”이라며 “올 6월 물가상승률은 낮아졌으나 물가 수준 자체는 여전히 높다”고 평가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되레 전망치를 높였다. ADB는 7월 19일 ‘2023년 아시아 경제전망 보충’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종전보다 0.3%포인트 상향한 3.5%로 전망했다.
주목할 대목은 기재부의 하향 전망이 시점상 집중호우와 폭염,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참여 중단 선언과 같은 대내외 변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먹거리 물가를 포함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애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정부도 다급해졌다. 7월 26일 추 부총리 주관으로 열린 ‘물가 관련 현안 간담회’에서는 집중호우로 인한 물가 상승과 향후 농축수산 품목의 물가 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7월 말부터 8월까지 최대 100억원을 투입해 농축산물 할인행사를 열기로 했다. 또 피해 농가에 대한 충분한 보상 방안을 마련해 8월 중 처리하고, 농작물 재해보험을 추정 보험금의 50% 내에서 선지급하기로 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과거 집중호우 이후 농축산물 수급 불안과 이에 따른 가격 상승이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을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최근 농축산물 물가가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을 주도한 건 2020년 9월이다. 당시 물가상승률은 1.0%로, 1%대로 올라선 건 6개월 만이었다. 긴 장마와 집중호우, 태풍 등의 영향으로 농축수산물이 전년 동월 대비 13.5% 오른 영향이 컸다. 당시 농축수산물의 물가 상승 기여도는 전체 품목 가운데 가장 높았다. 주원 실장은 “(7월 초) 기재부 전망 당시와 비교해 하반기 물가 상방 압력은 확실히 커진 상황이다. 특히 곡물 가격 급등세와 국제유가 상승세, 기저효과 등까지 감안하면 3분기 중에 다시 3%대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