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부터 귀한 지면을 얻어 ‘정책과 딜레마’를 연재했다. 이 연재는 정책이 있는 정치평론, 시사평론을 지향했다. 정치의 중심에 정책이 있어야 정치가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본래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연재의 취지였다. 전당대회 룰 개정이나 대통령과 여야 유력 정치인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측하는 게 논의의 중심인 이 지긋지긋한 정치 공론장에 조금이나마 균열이라도 내려는 취지로 연재를 시작했다. 망치로 몇 번 두드렸다고 생각했는데, 균열은 전혀 없어보인다. 뿅망치였던 것 같다. 어느 각도로 내리칠지를 고민할 게 아니라 연장부터 갈고 닦아야 했다 싶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2월 29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연재는 딜레마의 관점으로 정책을 하나씩 분석했다. 한 해 동안 부동산 보유세, 조세감면, 물가 대책, 대중교통 지원정책, 지역화폐, 정부의 세제 개편안, 학제 개편안, 국유재산 매각, 노란봉투법, 기초연금, 횡재세, 금융투자소득세와 증권거래세 등을 다뤘다. 번외로 ‘좋은 불평등’ 논의에 참여했다. 정책 논의를 선의와 정당성 중심에서 효과와 영향 쪽으로 전환시키고자 ‘딜레마’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어느 정책이든 딜레마의 상황에 있으니, 정책의 효과와 부작용 등을 꼼꼼히 따져보자는 취지였다. 하나씩 정책을 다룬 것은 정책별 논의가 충분히 이뤄져야 정책 공론장이 활성화되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이었다. 정책 공론장은 여전히 잠잠하다. 정쟁적 사안에 대한 논란은 시끄럽지만, 어느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잘 가닿지 않는다. 대안 논의도 조용하다.
임박한 재앙과 미온적 대응
그래서 이번 글에선 관점을 한번 바꿔봤다. 마침 2023년 새해다.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을 들고 정책 환경을 넓은 시야로 조망해보려 한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책의 역할이 절실하다. 불평등과 기후위기란 구조적 위기에 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가 겹쳤기 때문이다. 아직 코로나19도 끝나지 않았다. 당면한 위기가 위협적이어도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필연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의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 유별나게 대응이 늦은 분야는 조세와 복지다.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은 구조적 위기의 심화와 인구구조의 변화가 마치 없었다는 듯이 대증적인 정책들만 제시되는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가 조세 분야에선 부동산과 법인세 감세만을 제시하고, 복지 분야에선 ‘약자 복지’를 강조하는 게 상징적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조세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순 있지만, 조세에 대해 할 얘기가 다주택자와 대기업 감세뿐일까. ‘약자 복지’가 약자를 두텁게 지원하는 방향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약자일까. 심지어 정부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복지정책 토론회에서 청년과 노인이 서로 약자임을 경쟁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오징어게임을 탄생시킨 지옥 같은 경쟁 환경이 복지정책의 현장에서 재현된 셈이다. 최근 발표된 소득불평등과 가계부채 등의 지표는 긴급하고도 근본적인 대안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발표된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2020년 대비 2021년에 지니계수와 소득5분위배율 등의 분배지표가 모두 악화됐다. 한국은행의 2022년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가계부채가 1870조6천억원으로 고금리 상황에서 부채 규모가 증가했다. 이처럼 구조적 문제들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조세·복지 정책의 대전환 로드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다.
당면한 위기에 대응하는 경제정책과 산업정책도 미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임기응변에 능한 관료들이 급한 불은 꺼놨지만, 한국전력의 적자를 방치하고 여당 출신 무능한 지자체장의 잘못으로 채권 시장의 혼란과 위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상반기엔 부동산PF 채권의 상환이 대거 몰려 있어 건설사들은 줄도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안 그래도 부동산 시장이 어려운데 이자 부담 때문에 분양 물량을 밀어내고 있다. 하나의 문제를 방치한 탓에 다른 쪽으로 문제가 전이되며 더욱 커지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도 미국 연준을 따라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경제사령탑인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재계에 “임금 인상 자제를 요청”하는 철 지난 유행가를 반복했다. 데이터는 정반대의 사실을 알려준다. 물가보다 명목임금이 적게 인상됐고, 오히려 미국에선 인플레이션의 약 40%가 기업 이윤의 증가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들이 임금상승을 우려하는 이유 ‘불평등의 경제학’(9) ). 이런 데이터들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지난 20여년간 노동자의 협상력이 약화되고, 기업의 독점력이 커졌다는 반증이다. 이처럼 달라진 경제 환경에서 누군가는 극심한 피해를 입고, 누군가는 견딜 만한 피해를 입고, 누군가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지만, 이를 조정하는 정부의 역할은 보이지 않았다. 화물연대 파업의 쟁점인 안전운임제 역시 노동 사안이기도 하지만, 유가 상승으로 인해 화물차 기사의 부담이 커진 경제 현안이었다. 정부의 대응은 누군가에 종속되지 않은 자영업자라 노동권이 없다는 그들에게 ‘업무개시를 명령하는 것’이었다. 워낙 낮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탓에 노조 혐오에 기생하면서도 지지율이 오른 착시효과가 발생했고, 정부는 오른 지지율에 고무돼 정책기조를 유지한다는 태세다. 착시가 새로운 불행의 씨앗이 된 희한한 상황이다.
더 큰 재앙은 기후위기에서 올 게 분명하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상기후의 피해가 현실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통상과 경제 문제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현 대통령이 “모른다”고 발언해 정책 의제로서 유일하게 화제가 된 ‘RE100’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 중인 규범이다. 한국 기업들은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기업 차원에서 대응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이들이 깨끗한 에너지원을 사용하려면 국가 차원의 에너지전환 전략과 정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임박한 위협이다. 유럽연합이 2023년 10월 시범 실시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가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면 탄소를 과다 배출하는 국내 기업들은 유럽 국가에 수출할 때 막대한 탄소국경세를 내야 한다. 국회미래연구원이 2021년 9월 발간한 보고서(<탄소국경조정 메커니즘 도입에 따른 국내 산업계 영향과 대응방안>)에 따르면 2030년 국내 산업계가 유럽연합에 부담하는 탄소국경세는 모두 8조2456억원 규모로 이는 국내 기업의 EU 수출액의 11.3%에 달한다. 업종별로도 석유화학, 석유정제, 운송장비, 철강, 자동차, 전기·전자 등 주요 산업을 망라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보면 2030년 신재생에너지의 발전 비중은 21.6%로 문재인 정부가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에서 제시한 30.2%보다 8.6%포인트나 낮다. 문제는 정부의 인식이다. 기후 대응이 이미 산업정책이 된 시기에 윤석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를 이전 정부의 ‘탈원전을 위한 이권 사업’ 수준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 능력을 확인한 자본시장에선 이미 안보 불안이 아닌, 기후무대응에서 비롯된 새로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현상)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금의 추세론 머지않아 자본시장의 ‘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2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2023년도 예산안이 의결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구조개혁이 빠진 정책 방향
이런 구조적 문제와 당면한 위기에 정부는 어떤 정책을 내놨을까. 2022년 9월 15일 복지부 장관도 없이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발표한 ‘복지정책 방향’은 상세 내용이 담긴 자료는 물론 보도자료조차 없이 발표됐다. 안 수석의 “포퓰리즘에 의해 현금복지제도가 무차별적으로 확대”와 “누더기 상태의 복지체계 통폐합” 등의 자극적인 발언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하지만 안 수석의 발언은 현실과 다르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복지 지출은 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한국의 현금성 복지(cash benefit)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3%로 멕시코를 제외하면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다. 만일 정부가 현금성 복지 대신 서비스 복지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특히나 육아와 요양, 간병 등 돌봄 분야 복지서비스의 질을 제고하려 한다면 의미 있는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그러나 이들 서비스 복지를 민간 주도로 고도화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복지서비스의 공급을 열악한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로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지난해 12월 21일에 발표한 ‘2023년도 경제정책 방향’은 아예 구조개혁의 번지수마저 틀렸다. 앞서 제시한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은 찾기 힘들다. 대신 3대 구조개혁으로 노동개혁, 교육개혁, 연금개혁을 내세웠다. 핵심 내용은 엉뚱하거나 알맹이가 없다. 노동개혁으론 연장근로를 통해 근로시간을 늘리는 것이고, 교육개혁의 핵심 내용은 대학 운영의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연금개혁으론 ‘5차 재정추계에 맞춰 국민연금 개혁안 및 연기금 운용 개선방안 마련’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문구만 담았다.
이쯤 되면 어떻게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새해에도 우리는 정치권에서 누가 공천을 주도하는 게 옳은지, 공천 혁신이 뭔지 등 실체 없는 ‘혁신 경쟁’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 정책으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의 역할이 미진한 상태를 지금처럼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필자는 그나마 희망을 지역과 시민사회에서 찾는다. 중앙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지역 단위에서 다양한 주체가 새로운 시도에 나서 보고, 그 결과로 무기력한 중앙정부에 맞서는 것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는 ‘담론 경쟁’만으론 이 무기력한 상황을 타개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작지만 실천적인 사례들로 맞서보는 게 어떨까. 지역에서 여러 주체가 만드는 작은 사례, 그것은 돌봄일 수도 있고, 기후 대응을 위한 폐기물 순환과 에너지전환일 수도 있다. 작지만 혁신적인 성공 사례들이 반전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새해에 새롭게 제시하고 싶은 화두다.
<윤형중 LAB2050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