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로 최저임금 1만원을 내세우면 당선은 확실하겠네요.”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분위기가 실제로 그랬다. 모든 정당의 후보들이 실현 시기만 차이가 있을 뿐 최저임금 1만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불과 5~6년 만에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2022년에 연거푸 치러진 대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최저임금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최저임금은 찬밥 신세가 돼버린 것일까. 최저임금이 너무 많이 올라서? 간단한 계산만 해봐도 사실이 아니다. 2017~2018년에 최저임금을 많이 올리긴 했지만 2019~2021년까지 인상률은 최악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 5년간의 최저임금 평균 인상률은 7.2%로, 박근혜 정부 4년간의 평균인 7.4%에도 못 미쳤다.
“최저임금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최저임금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어쩌면 이 한마디에 지금 최저임금 제도가 가진 모순이 모두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최저임금은 제도로서의 실효성·보편성을 잃어버렸다. 한마디로 그 권위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 때문이다. 월 1회 지급하기만 하면 교통비·식비는 물론이고, 유류비·생산장려수당·통신비·자기능력개발수당 등 온갖 수당이 죄다 최저임금에 포함된다. 상여금과 수당까지 다 포함해 임금 총액이 최저임금 이상이기만 하면 법 위반을 피해갈 수 있도록 법을 바꿔버린 탓에 최저임금액을 아무리 올리더라도 실제로 내가 받는 임금은 늘어나지 않는다.
둘째, 수직계열화된 한국 산업구조의 원·하청 거래 관련 제도개선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납품단가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하청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청업체 사장의 지불능력이 뻔한데 돈줄을 쥐고 있는 원청의 부담과 책임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하청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큰 기대를 걸 수가 없다.
셋째, 고용형태가 다변화되면서 특수고용·플랫폼노동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우 근로기준법은 물론이고, 최저임금법 적용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퀵서비스·대리운전·택배·배달기사들을 생각해보면 쉽다. 최저임금 인상과 이들의 수입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가.
넷째, 최저임금 인상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정부의 근로감독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 문재인 정부는 근로감독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최저임금 위반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최저임금은 적용대상 확대의 역사 돌아보면 최저임금이 ‘국민임(금협상)투(쟁)’라 불리며 엄청난 관심을 얻어온 과정은, 최저임금 적용대상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온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근로계약서 쓴다고 모든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이 똑같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경비노동자를 비롯한 감시·단속 업무 종사자는 2007년에야 비로소 최저임금의 70%를 보장받기 시작해 2008년에는 80%, 2012년에는 90%로 늘어난 후 2015년부터 비로소 최저임금 100%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택시노동자들 역시 사납금이라는 기만적 임금시스템을 이유로 최저임금 적용이 배제되다가 2007년에 법이 개정되며 비로소 최저임금제도 내로 들어왔다.
이 과정들 모두 순탄하지는 않았다. 경비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며 최저임금 감액적용이라는 명백한 차별에 맞서 싸웠고, 택시노동자들 역시 최저임금법 적용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매년 최저임금 교섭이 열릴 때마다 최저임금위원회 앞으로 처음에는 청소노동자들이, 그다음에는 경비노동자들이, 그다음에는 택시노동자들이 합세했다.
집회가 열리면 언제나 수많은 업종의 다양한 노동자가 함께한다. 집회는 이들이 겪는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의 폭로 경연장으로 바뀐다. 한번 참석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에 또 가고 싶은 집회 1순위로 최저임금위원회 앞 집회를 꼽을 정도로 최저임금 투쟁은 역동성이 넘쳐흘렀다.
감시·단속 노동자의 최저임금 감액적용이 폐지되고 택시노동자의 최저임금법 적용이 이뤄지면서 이들은 실제 자신의 임금이 오르고 삶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연히 저임금 노동자들 속에서 최저임금은 보편성이라는 신뢰를 얻기 시작했고, 최저임금 제도의 실효성과 신뢰가 전체 노동자 속으로 퍼져갔다.
그 역동성은 2015년부터 양대 노총이 요구안으로 결정한 ‘최저임금 1만원’ 슬로건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사실 최저임금을 인상해온 원동력은 ‘1만원’이라는 선명한 액수가 아니라 최저임금에 대한 저임금 노동자들의 강력한 신뢰에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선거를 앞둔 정치세력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런 열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보편성과 권위에 생채기 내는 자본 따라서 자본의 공세는 최저임금 제도의 실효성을 무너뜨리는 쪽에 집중된다. 가장 먼저 최저임금이 오르면 상여금과 수당을 기본급에 녹여 임금인상을 회피하는 편법·불법을 동원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부터 조선업 위기를 빌미로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상여금 530%가 지속적으로 기본급에 녹여져 사라지고 만 일이었다.
최저임금이 인상돼도 하청노동자 임금은 몇년 동안 한푼도 오르지 않아 무려 30%의 임금삭감을 겪게 된다. 이게 바로 지금 거제의 하청노동자들이 한 달 넘게 파업과 농성을 지속하는 발단이 된 사건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개악함으로써 이런 편법·불법을 합법으로 포장해주고 말았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내 임금도 오르던 ‘보편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강한 신뢰도 무너져 내린다. 실효성과 권위가 사라지자 최저임금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낮아졌다. 산입범위 개악 직후인 2019년부터 최저임금 인상률도 떨어져 올해는 높은 인플레이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인상률을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비롯한 사용자들은 최저임금의 업종별 차등적용을 주장하고 나섰다. 감시·단속 노동자 감액적용 폐지가 엊그제 일인데 아예 업종별로 다양한 감액적용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최저임금 제도의 권위를 완전히 망가뜨리려는 시도다.
영리하게도 경총은 최저임금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리면 자연스럽게 인상률 하락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저임금 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가 강해지면 인상률도 따라서 높아졌다는 경험에 따른 학습효과다. 경총이 최저임금 동결보다 업종별 차등적용 쟁점화에 온 힘을 다 쏟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랫폼·특수고용으로 적용 확대를 애물단지로 전락한 최저임금을 다시 저임금 노동자의 희망으로 만들려면 다시 한 번 최저임금 적용대상 확대를 통해 보편성을 강화해야 한다. 확대의 방향은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플랫폼노동과 특수고용 쪽으로 적용대상을 넓혀야 한다.
최저임금법 제5조 제3항은 “임금이 통상적으로 도급제나 그 밖에 이와 비슷한 형태로 정하여져 있는 경우로서 제1항에 따라 최저임금액을 정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최저임금액을 따로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미 현행 최저임금법에 플랫폼·특수고용처럼 도급제로 임금이 정해지는 경우에 대비한 조항이 마련돼 있다. 1988년 법 제정 당시부터 있었던 조항으로 시행 34년 동안 잠만 자고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조항이기에 사용하기로 결단만 내리면 된다.
게다가 조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물운송 분야의 안전운임제도와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옳거니!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투쟁 당시 이 제도가 화물운송 분야의 최저임금 역할을 한다는 얘기를 언론에서 자주 다루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제도를 최저임금과 연결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최저임금위원회가 지난해에 ‘플랫폼 노동자의 생활실태를 통해 살펴본 최저임금 적용방안’이라는 연구용역을 실시해 보고서까지 나왔으며, 지난 3월 말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공개 토론회까지 거쳤다는 사실이다.
업종별 차등적용 연구용역은 여전히 쟁점이지만 플랫폼 노동에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방안은 이미 연구용역을 완료한 과제다. 그렇다면 이제 배달·배송 분야처럼 상대적으로 적용이 용이한 부문을 뽑아 안전배달료·안전요금과 같은 이름으로 시범실시를 추진해볼 충분한 근거도 마련된 것 아닌가.
다시 역동성의 광장으로 앞에서 최저임금 제도의 실효성이 망가진 이유로 4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실효성을 높이려면 플랫폼·특수고용으로 최저임금 적용을 확대하는 방안만이 아니라 정부 근로감독 강화, 개악된 산입범위 원상회복, 최저임금 인상 시 원·하청 거래에서 납품단가 조정 등의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이중 뒤의 2가지는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중장기 전략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반면, 앞의 2가지는 관련 법 조항이 이미 존재하며 정부의 행정조치만으로도 가능한 과제이기에 지금 당장 이의 실현을 요구하는 운동을 조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최저임금 위반이 가장 극심한 부문인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노동·시민단체가 특화된 최저임금 위반 고발센터를 운영해 실태를 폭로한다면 정부 근로감독을 압박할 좋은 수단이 돼줄 것이다. 배달라이더, 택배·대리운전기사 등에게도 최저임금법을 적용하도록 요구하고 실제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벌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상을 한번 해보자. 매년 최저임금위원회 앞에 청소·경비·택시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이 합류하는 모습을 말이다. 각 업종에서 저임금을 강요하는 기상천외한 사례들 폭로대회가 열리고, 이 노동자들에게도 최저임금법을 적용하라 요구한다면? 최저임금 제도의 보편성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운동의 역동성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안전운임제라는 형태로 화물운송 분야 최저임금 제도가 실시되다가 일몰제로 사라지려 하자 화물노동자들이 이 제도의 유지·확대를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이 역동성이 살아난다면 최저임금 인상률과 인상폭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