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가는 저성장의 또 다른 얼굴

유가 등 원자재 가격 하락이 원인… 소비 부진과 경기침체로 이어져

토요일인 7월 23일 직장인 이모씨는 집 근처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유치원생 아이와 부부 세 식구인 이씨는 주말에 일주일치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구입해 놓고 쓴다. 이날 이씨가 구입한 것은 국거리용 한우 300g(2만1900원), 고구마 1.6㎏(7990원), 사과 5개(6990원), 방울토마토 1.5㎏(7990원), 우유 1ℓ짜리 4개(9160원), 유아용 샴푸(2만3000원) 등 대부분 생필품이다. 이씨가 계산한 금액은 총 9만7550원. 이씨는 “기본적인 먹거리와 생활용품 사는 데만도 매주 10만원은 기본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정부에서는 자꾸 저물가라고 하는데 어떤 물가가 낮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7월 14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한은 기자실을 찾아 물가목표치 달성 실패에 대한 ‘해명성’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상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0.9%로, 한은이 2016~2018년 달성할 중기 물가안정 목표치로 내세운 연 2%의 절반도 안 된다. 한은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개월 연속 물가안정 목표에서 0.5%포인트 이상 벗어나면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관련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총재는 “국내외 경기회복 지연으로 수요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이 미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유가 등이 큰 폭 하락한 데 주된 원인이 있었다”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수준에 접근하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가상승률이 2% 언저리는 돼야 ‘안정’된 것인데, 너무 낮으니 물가를 끌어올리는 쪽으로 정책을 운용하겠다는 취지다. 소비자들은 외식비, 생필품 값이 너무 올랐다고 아우성인데 물가안정 책임자인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가 너무 낮아서 걱정인 셈이다.

이마트가 온라인 쇼핑몰과의 가격 경쟁을 위해 기저귀를 유통업계 최저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2월 18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고객들이 기저귀를 고르고 있다./이마트 제공

체감물가와 동떨어진 정부 물가지표
통계청에서 매달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지수는 상품과 서비스 481개 품목의 가격지수를 가계지출의 비중에 따라 가중 평균해 산출된다. 소비자물가지수는 노사 간 임금협상을 하거나 정부가 최저생계비, 공적연금 급여 등을 산정할 때 중요한 지표로 활용된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인 물가안정목표제도 소비자물가지수를 대상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각종 정책 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는 소비자물가지수가 체감물가와 괴리되면 정부 정책이 실생활과 동떨어지게 되고,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소비자의 체감물가 상승률은 평균 2.7%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1.1%에 비해 1.6%포인트나 높았다. 소비자물가지수와 체감물가가 ‘따로 노는’ 데에는 우선 심리적 요인이 적잖이 작용한다고 분석할 수 있다. 예산정책처는 “소비자물가지수는 매달 전국의 점포에서 거래된 실제 가격을 판매자를 통해 측정한 후 취합해 작성되는 반면, 소비자의 물가 인식은 자신의 체험과 정보를 토대로 하고 있어 기억력, 다양한 심리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보다 오르는 데에 더 민감하고, ‘전년 동기’ 대비 상승률을 보여주는 소비자물가지수와는 달리 최근의 단기간 내에 경험한 가격 변동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물가를 더 높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질적인 변화를 반영하느냐 여부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제품 가격의 상승분 전체를 지수에 반영하는 게 아니라 질적 개선 여부를 감안해 전체 가격 상승분의 일부만을 지수에 반영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가격이 1년 새 10% 올랐어도 품질이 10% 향상됐다면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가격 상승분 가운데 질적 변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산정책처는 “예컨대 고등어와 같이 질적 변화가 거의 없는 제품의 가격이 올랐을 때 소비자가 가격 상승률을 판단하기는 쉽다”며 “그러나 새로운 기능을 갖춘 제품이나 전혀 새로운 제품이 판매될 경우 그 가격 가운데 순수한 인플레이션 기여분이 얼마인지를 소비자들이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고 밝혔다.

기준금리 인하해도 효과 별로 없어
어쨌든 장기적인 추세로 볼 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481개 세부품목 가운데 가격이 하락한 품목은 2011~2012년 평균 79개였으나 2013~2015년 126개로 증가했다. 3년 연속 가격이 떨어진 품목도 2013년 25개→2014년 32개→2015년 39개로 꾸준히 늘어났다.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은 것은 국제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올 상반기 국제유가는 오름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서는 여전히 35% 정도 낮은 수준이다. 석유류와 농산물 가격 변동 등 일시적인 외부 충격에 의한 물가변동분을 빼고 계산한 근원인플레이션율은 올 상반기 1.7%로 물가목표치에 꽤 근접해 있다. 국제유가 하락 등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8%포인트(근원인플레이션율 1.7%-소비자물가상승률 0.9%) 끌어내린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물가가 낮은 건 반가운 일이다. 소득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가 떨어지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커져 가처분소득을 높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유가가 궁극적으로 글로벌 공급 과잉과 수요 부족, 생산 부진을 반영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려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지속된 저유가 현상은 원유의 공급과잉 상태가 수년째 지속된 가운데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자 한국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성장세 둔화가 반영된 결과다. 수출주도형 성장에 기대온 한국 경제에 글로벌 수요 감소는 악재다. 또 저물가가 지속되면 사람들의 기대인플레이션율(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이 낮아지고 이는 임금상승률 둔화, 경제심리 위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들이 앞으로 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소비를 줄여 생산 감소, 성장률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저물가에 대응해 쓸 수 있는 수단은 기준금리 인하다. 한국은행은 이미 지난해 두 차례 인하했고, 올 들어서도 지난 6월 추가 인하해 현재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치인 연 1.25%까지 낮아졌다. 문제는 금리 인하가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물가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회 안전망이 든든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다 보니 사람들이 선뜻 지갑을 열지 않고, 이자수익률이 낮아도 일단 저축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시중에 풀린 돈이 주로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부동산시장 거품과 가계부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일본계 투자은행인 노무라는 한국 경제에 대해 “고령화 등에 대비해 재정정책이 보수적으로 운용되는 가운데 내수 부진에 따른 저물가가 지속되면서 수년 내 통화정책이 금리 하한 수준으로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며 “중장기적으로도 일본형 부채 디플레이션과 제로금리정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의 저물가는 경기침체 하에서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의 전형적인 현상”이라며 “경기가 안 좋으니 사람들이 소비하는 물건이 식료품이나 생필품 등으로 매우 한정돼 있고, 그러다 보니 물건값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 역시 금리정책의 한계를 인정한다. 이주열 총재는 “물가안정이 한국은행만의 책임이라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물가를 끌어올리려면 마이너스 금리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렇게 하면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이주영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young78@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