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자동차 급발진사고 원인 밝혀질까

‘사고기록장치’ 정보 공개법안 통과… 자동차업계 대응책 마련 고심

11월 22일 자동차업계가 민감하게 반응한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 국토해양위 소속 임내현 의원(민주통합당)이 대표 발의했던 자동차 ‘사고기록장치’(Event Data Recorder) 장착 여부 및 정보를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포함된 것. EDR의 기록 내용을 공개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제공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하는 조항까지 포함됐다. 고객들의 요구에도 회사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EDR 정보 공개를 거부했던 자동차업계는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하다. 특히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자동차 사고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데, EDR 정보 공개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소비자들의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자동차 급발진 사고 현장을 실험하는 모습. | 경향신문

자동차업계가 EDR 정보 공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있다. EDR는 사고가 났을 때 충돌 전 3~5초, 충돌 후 10초 정도의 자동차 상황을 기록하는 장치다. 사고 당시 브레이크등이 들어왔는지, 사고 당시 차량 속도가 얼마였는지, RPM(Revolutions per Minute·자동차의 분당 엔진 회전수)이 얼마인지 등이 기록된다. 만일 사고차량의 EDR 정보를 분석했는데, 브레이크가 작동된 상황에서 자동차 속도가 150㎞ 이상이 나왔다고 한다면 급발진을 의심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런 경우 사고 상황을 재연해 운전자 과실인지, 차량의 문제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EDR 정보가 급발진 여부를 밝혀줄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셈이다.

국내 자동차 판매량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소비자들의 EDR 정보 공개 요구에 대해 ‘영업비밀’이라며 거부해 왔다. 이번 법안으로 3년 후(자동차 메이커가 EDR 장착을 준비할 수 있게 3년의 유예기간을 뒀다) 소비자의 요구가 있으면 EDR 정보를 공개해야만 한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법안이 마련됐으니 EDR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하지만 EDR 정보가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 원인을 밝혀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업 비밀” 내세워 그동안 공개 거부
국내 제조업체 차량의 경우 소비자의 예상과 달리 EDR가 상당히 많이 장착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2008년 이후부터 대부분의 차량에 EDR가 장착되어 있다. EDR에 저장되는 정보 또한 30개 항목을 넘을 정도로 세분화해 있다. 이런 정보가 그동안 소비자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 임내현 의원실 관계자는 “EDR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의 과실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다. 그런데도 국내 자동차회사에서 쉬쉬하고 있었다”면서 “이 법안을 준비할 때 자동차업계가 비협조적으로 나왔는데, 급발진 사고가 운전자 과실이 아니라 차량 결함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소송이 잇따를 것이라는 부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임내현 의원실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르노삼성 차량에 장착된 EDR에는 사고 당시 속도와 브레이크의 작동 여부만 기록됐다. 현대차의 경우 차량 속도, 브레이크 작동 여부, 안전벨트 상황, 에어백 작동 여부 등을 포함해 37개의 항목이 기록되고 있다. 기아차의 경우에는 31개 항목이 기록된다. EDR가 장착된 차량 종류도 현대·기아차가 르노삼성, 쌍용, 한국GM보다 훨씬 많다. 2012년 7월 현재 생산되는 차량 중 현대차는 16개 종류의 차량 중 15개 종류의 차량에 EDR가 장착되어 있다. 기아차의 경우에도 16개 차종 중 15개 차종에 EDR가 장착되어 있다. 쌍용자동차의 경우 EDR 장착 판매차량이 없고, 에어백 장착 차량에 일부 데이터가 기록되고 있다. 한국GM의 경우 크루즈·올란도 등 5개 차종에 EDR가 장착되어 있고, 아베오·스파크 등에는 데이터의 일부만 저장되고 있다. 르노삼성은 자동차 사고 당시 에어백이 터졌을 때 속도와 브레이크 작동 여부만 기록되고 있다.

자동차 업계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EDR 정보는 지난 5월 정부가 꾸린 ‘차량 급발진 합동조사반’ 덕분이다. 합동조사반은 자동차 제조사에 요청해 급발진 추정 사고 차량의 EDR 정보를 받아 처음으로 공개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이 합동조사반에 거는 기대는 높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합동조사반이 발표한 1·2차 조사 결과에서 급발진 여부를 밝혀내지 못했다. 합동조사반의 조사가 ‘형식적’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11월 21일 정부과천청사 국토해양부에서 열린 ‘자동차 급발진 2차 조사 결과 브리핑’에서 교통안전공단 직원들이 사고기록장치(EDR)를 연결하고 있다. | 연합뉴스

3년 후부터 “소비자 요구 땐 공개해야”
합동조사반 단장을 맡고 있는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윤영한 교수(메카트로닉스공학과)는 “차량 급발진을 밝히려면 차량사고를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하지만 급발진은 한 번 일어나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EDR 정보가 급발진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사고의 경우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합동조사반 반장을 맡고 있는 국토해양부 손영삼 사무관도 “합동조사반의 조사 결과에 대한 불신이 높은데,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고 공정하게 조사했다”고 해명했다.

EDR가 처음 차량에 장착된 나라는 미국이다. 199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됐고, 지난 9월 1일 EDR 정보를 소비자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됐다.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 박기옥 연구원은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EDR 관련 법안은 이번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과 비슷하다. EDR 장착을 의무로 한 것이 아니고, EDR 장착 차량의 경우 소비자가 원하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안”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법에 의해 EDR에 기록되는 필수항목은 15개(사고시 자동차 속도, 브레이크 작동 여부 등)와 선택항목 30개로 정해져 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EDR가 장착된 차량이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유예기간 3년 동안 EDR에 기록될 정보의 종류를 정할 계획이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