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디자인 경영 ‘가속’ 디자인 기아 ‘질주’

4월 국내 판매 준대형 등 4개 차급서 1위… 정의선 부회장 전략경영 결실

기아차가 ‘디자인’과 ‘기술력’을 앞세워 국내 자동차 업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1998년 현대차에 합병된 이후 현대차의 그늘에 가려 현대차의 ‘자매차’라는 인식을 넘어 최근에는 모기업인 현대차의 아성을 넘보는 위치에까지 무섭게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29일 열린 ‘2010 부산국제모터쇼’에서 발표된 기아차의 신형 중형차 ‘K5’.

우선 판매 실적만 봐도 그렇다. 기아차는 최근 의미심장한 결과치를 달성했다. 지난달에 기아차 4개 차량이 차급별 국내판매 1위를 차지한 것. 기아차가 자랑하는 쏘렌토R(중형 스포츠실용차)와 야심작 K7(준대형) 및 모닝(경형), 기아차의 전통 베스트셀러카인 프라이드(소형) 등이 차급별 판매 1위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경차인 모닝을 빼고는 모두 모기업인 현대차의 경쟁 차종인 싼타페, 그랜저, 베르나를 제친 성적이다. 5월 판매량에서는 새 차종인 스포티지R마저 현대차의 경쟁 차종인 투싼을 제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현대차의 자존심인 쏘나타의 경쟁 차종으로 최근 부산 모터쇼를 통해 선보인 중형차 ‘K5’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기아차의 야심작 ‘K5’는 지난 2005년 11월 중형 세단 ‘로체’ 출시 이후 4년 5개월만에 선보이는 풀 체인지 모델로, 프로젝트명 ‘TF’로 개발에 착수해 4년 간의 연구개발(R&D) 기간에 총 4000억원을 투입해 완성됐다. 페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은 ‘K5’에 대해 “지금까지 기아차에서 디자인한 차량들 가운데 가장 만족스런 디자인”이라며 “한국의 역대 자동차들 가운데 가장 유럽 냄새가 나는 차”라고 자평했다.

삼성 신임 임원 84%가 기아차 선택
기아차 관계자는 “지난 3일 사전계약에 들어간 ‘K5’는 이날 하루 9000대 가량이 사전계약됐다”고 밝혀 ‘K5’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K5’의 높은 인기 속에 국내 중형차시장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독주를 해 온 ‘중형차 시장의 리딩 카’인 쏘나타는 비상이 걸렸다. 쏘나타는 강력한 경쟁 차종인 르노삼성의 뉴SM5가 출시된 이후에도 1만2000~1만4000대의 성적을 꾸준히 유지해 왔지만 4월에는 1만1138대가 팔려 3월에 비해 판매량이 23.6%나 줄어들었다.

경쟁 모델인 르노삼성의 뉴SM5가 지난달 국내에서 3월보다 12.5% 증가한 7474대가 팔린 것을 감안하면 결국 쏘나타의 이 같은 판매량 감소의 주범은 기아차의 ‘K5’ 때문인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동급 모델의 차별화로 상호수요 잠식 현상을 막아 보려던 현대기아차로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기아차의 약진에 힘입어 지난 3월 국내 자동차시장 점유율은 현대차 48.1%, 기아차 30.84%를 기록했다. 그러나 4월에는 기아차가 31.34%로 오른데 반해 현대차는 45%로 떨어지는 등 기아차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한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쏘나타와 함께 현대차의 양대 자존심 차량인 그랜저도 기아차의 ‘K7’에 밀리는 형국이다. 올 1분기에 ‘K7’은 국내에 모두 1만3409대가 팔려 국내 준대형 세단의 최강자인 그랜저(1만2654대)를 제쳤다. 현대차 그랜저가 국내 준대형 차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K7’의 선전은 의미가 크다. 그러나 그랜저가 올해 말에 완전 변경되기 때문에 ‘K7’가 선방을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즉 올해 그랜저를 살 경우 1년도 채 안돼 올해 신차가 구형 모델이 된다는 점이 ‘K7’에 1위의 아성을 내줬다는 변명도 아주 설득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K7’은 실제 준대형 차량 소비자들로부터 이미 호평을 받고 있는 차다.

올해에도 삼성그룹의 신규 임원 대다수가 자신이 타고 다닐 업무용 차량으로 기아차를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12월 정기 인사로 승진한 임원 260명에게 임원용 차량을 선택하도록 한 결과 84.6%인 220명이 기아차를 고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기아차는 대형 세단 오피러스가 124명(47.7%), 준대형 세단 ‘K7’는 96명(36.9%)이 각각 선택했다. 르노삼성 SM7(17명), 쌍용 체어맨(14명), 현대 그랜저(5명) 등은 소수에 그쳤다. 오피러스의 경우 지난해는 물론 과거에도 삼성의 새 임원들이 선호하는 모델로 인기를 끌어왔지만 이제 막 출시된 ‘K7’이 출고 적체 등 불편한 점이 있음에도 SM7, 그랜저 등 경쟁 모델을 제친 것은 그만큼 무난하고 깔끔한 스타일과 신차라는 점이 삼성 임원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후문이다.

기아차의 최근 기세가 무섭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K7’, 쏘렌토R, 모닝, 뉴프라이드.

기아차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2010 뉴욕국제오토쇼’에서 기아차는 단연 주목을 받았다.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뉴욕 오토쇼를 통해 주목을 끈 메이커가 많았지만 세계 최초로 K5를 공개한 ‘기아차’가 받은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아차 관계자에 따르면 “기아차에 대한 관심의 핵심은 디자인”이라면서 “포르테와 신차 K5, K7으로 이어지는 독특하고 차별화한 디자인 아이덴티티와 간결함을 핵심으로 한 균형미에 많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의 찬사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미국 유일의 전국지인 USA투데이도 최근 뉴욕국제오토쇼에 출품된 ‘K5’(수출명 옵티마)에 대해 “기아 옵티마가 백조로 변신했다”고 극찬했을 만큼 기아차의 디자인은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도 뉴욕모터쇼와 관련한 기사로 ‘K5’를 다루면서 “배지를 떼고 보면 마치 유럽의 고급 자동차라고 착각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판매도 호조세다. 기아차 최초의 ‘메이드 인 USA’ 차량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쏘렌토R는 미국 중형 크로스오버차량(CUV) 시장에서 경쟁 차종인 도요타 ‘라브4’를 추월했다.

세계 3대 디자이너 ‘슈라이어 효과’
기아차가 이처럼 최근 국내외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이유는 바로 ‘디자인의 힘’이다. 기아차가 ‘디자인의 기아’로 환골탈태하는 계기가 된 것은 정의선 부회장이 2006년 기아차 사장으로의 취임 이후다.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국내 자동차 기업 최초로 전사적인 ‘디자인경영’을 표방하면서 영국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한 세계 3대 디자이너 페터 슈라이어 부사장을 영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 슈라이어 부사장은 보수적인 BMW 스타일링을 변화시킨 크리스 뱅글, 폴크스바겐 그룹에서 벤틀리·부가티·세코다를 포함해 디자인을 총괄하는 발터 드 실바와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힌다. 그는 1980년 아우디에 입사한 뒤 1994년 아우디 디자인총괄책임자(CDO)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아우디에서 A2를 시작으로 A3, A4, A6, A8 등 아우디 전 라인업을 아우르며 디자인에 참여하고 아우디TT와 TTS를 디자인하며 최고디자이너로 각광받았다.

슈라이어 부사장은 기아차에 온 뒤 유럽형 스타일의 ‘포르테’와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 대한민국디자인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쏘울’을 디자인해 기아차의 디자인을 한 단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K7을 비롯해 스포티지R와 K5의 디자인 역시 슈라이어의 작품이다. 슈라이어 부사장은 지난 4월 2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0 부산국제모터쇼’ 언론과의 만남(프레스데이) 행사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기아차만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1944년 경성정공㈜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래 1987년 일본 마쓰다 파밀리에를 기초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브리사’를 만들고 미국 포드와의 기술 제휴, 1997년 자금난으로 인한 법정관리를 거쳐 현대차와의 합병 등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은 기아차가 이제 ‘디자인’을 무기로 새롭게 ‘자동차 명가’로의 새로운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호랑이 얼굴 형상화 ‘기아차 패밀리룩’ 탄생

자동차 업체가 명차 업체로 ‘일가’를 이루려면 무엇이 전제돼야 할까. 경차에서부터 중형, 대형, 스포츠세단까지 풀라인업 모델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세계적인 명차들은 굳이 자동차에 붙어 있는 제조사 표시인 ‘엠블럼’을 보지 않고도 그 차가 한 제조사의 차량임을 알 수 있다. 벤츠나 BMW, 도요타 등 세계적인 명차들은 자동차가 멀리 있어도 패밀리룩을 통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패밀리룩은 원래 가족끼리 입는 옷을 말하지만 지금은 자동차에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말로, 회사 고유의 자동차 디자인 특징을 말한다. 패밀리룩은 라디에이터 그릴을 비롯해 자동차의 라인의 일치도, 헤드램프, 자동차 후면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보통 패밀리룩이라고 하면 라디에이터 그릴 디자인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많은 회사가 라디에이터 그릴로 패밀리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해외 유명 자동차 회사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패밀리룩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패밀리룩은 메르세데스 벤츠에 쓰이고 있는 세 꼭짓점 별과 장방형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1920년대에 고안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1930년대 벤츠의 부흥기부터 이 패밀리룩은 벤츠의 성능과 안전성, 벤츠를 타고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BMW는 사람의 신장 모양을 닮아 붙여진 키드니 그릴을 사용한다, 키드니 그릴 역시 1977년에 걸쳐 BMW의 최신 차량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조는 자동차를 감싸고 있는고양이 눈을 형상화한 크리스털 헤드램프를 중심으로 앞으로 툭 튀어나온 앞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 또한 전면유리의 경사도와 라인 등 자동차 앞부분의 모든 부분을 패밀리룩화해 놓았다.

국내 메이커에서 패밀리룩을 만들어 자리 잡고 있는 회사는 바로 기아자동차다. 기아차는 디자인 경영을 목표로 세계적인 디자이너 페터 슈라이어 영입 후 가장 큰 성과인 패밀리룩을 자리 잡게 했다. 로체 이노베이션을 시작으로 최근 출시한 스포티지R까지 호랑이 입과 코를 형상화한 라디에이터 그릴은 완벽하게 기아의 패밀리룩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른바 ‘슈라이어 라인’이다. 특히 패밀리룩을 적용한 차종 중 ‘쏘울’은 세계 3대 디자인상 가운데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상을 받는 등 단순히 패밀리룩을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기아자동차의 전체적인 디자인 수준 또한 높였다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