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후 교수 여론조사 결과 분석…공항 건설 반대·탄소세 부과 찬성 등
개발을 지지하고 규제를 반대해온 보수 유권자층이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서는 기존의 성향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는 ‘기후정치바람’ 주최로 ‘2024 총선 결과를 바꿀 기후유권자, 기후정책과 표심’ 집담회가 열렸다. 이날 집담회에서 ‘기후 이슈 지역과 기후유권자’를 발표한 이관후 건국대 교수는 “기후위기 이슈는 생각보다 복잡하다”면서 “보수 유권자층은 개발 공약을 지지하고 일자리 확대 정책을 선호할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조사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수의 선거구에서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 표 되는 기후공약
‘기후정치바람’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전국 17개 시도 1만7000명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국민 인식조사(전국 여론조사)를 했다. 이를 토대로 기후위기와 관련된 정보를 인지하고 기후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후위기 의제를 중심에 두고 투표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닌 유권자층을 ‘기후유권자’로 분류했다. 또 전국을 67개 권역으로 나눠 ‘기후유권자’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21개 권역을 ‘기후선거구’로 지정했다.
이관후 교수는 각 기후선거구의 지역별 기후의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 이날 발표했다. 경기도 기후선거구인 과천·광명·군포·부천·시흥·안양·의왕에서는 경기국제공항 건설 추진에 대해 보수성향의 응답자 51.6%, 중도성향의 응답자 48.9%, 진보성향 응답자 60.3%가 ‘기후위기 시대에 맞지 않으므로 철회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산지개발에 대해서는 보수성향, 진보성향 응답자 모두 80%에 가까운 비율로 ‘제한해야 한다’고 답했다. 서울의 기후선거구인 은평·서대문·마포에서는 자동차 적정대수 규정(차량등록 제한)에 관해 민주당 지지층의 64.1%, 국민의힘 지지층의 68.7%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의 기후선거구인 강릉·속초·고성·인제·양양에서는 주문진 폐기물 매립장 설치를 두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58.1%, 국민의힘 지지층의 48.6%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공항 건설에 찬성하고 일자리 정책만 있으면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며 “인천 부평구에서는 공공요금 탄소 배출 비용부과에 대해 찬성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었고, 정당지지층 간에 차이가 없었다. 보수성향 유권자들은 탄소세 부과에 반대하리라 생각하지만, 조사 결과 이와 달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기존 구도가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기후유권자 상당수가 고령층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고연령층 유권자 상당수는 기후재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기후민감도가 굉장히 높다”라며 “실제 보수성향 유권자들은 국민의힘이 생각하는 것보다 기후 문제에 더 민감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라고 말했다.
‘기후정치바람’은 전국 유권자의 33.5%를 기후유권자로 추산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부동산 심리를 자극하는 각종 개발공약부터 내놓고 있다. 지난 2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울산에서 ‘민생토론회’를 열고 “보존등급이 높은 그린벨트라고 해도 더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 필요가 있고 시민들의 필요가 있으면 바꾸겠다”라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철도 지하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민의힘은 예상보다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김포시의 서울 편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정치권은 관성적으로 기후 문제는 득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지난 2월 21일 국회 집담회에서 ‘초격전지와 기후유권자’를 발표한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정치인들의 눈에 안 보일 뿐이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유권자는 상당히 많다. 아직도 정치권은 기후위기 의제를 던졌을 때 표가 될지 고민한다”라며 “기후유권자는 실존하고 표가 된다. 정치권은 ‘표 안 되는 기후공약을 내서 밀리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후유권자가 33.5%라는 조사 결과를 두고 ‘내 주변에는 없다’, ‘그럴 리 없다’라는 반응을 가장 많이 들었다”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는 125개국 13만명을 대상으로 벌인 기후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구온난화에 맞서기 위해 가계소득의 1%를 기부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9%가 ‘기부하겠다’고 답했고, 6%는 ‘1%보다는 작지만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당신네 나라 시민들의 몇% 정도가 1% 기부 의사를 밝힐 것 같은가’라는 질문의 답은 평균 43%에 그쳤다. 서 대표는 “26%의 차이다. 유권자 3명 중 1명이 ‘기후유권자’로 나왔는데, ‘그럴 리 없다’라고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라고 말했다. 서 대표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이번 조사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시민들이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가져보자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기후유권자 규모가 조사를 통해 확인된 만큼 정치권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기후의제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가 나왔다. 지난 1월 미국 콜로라도대학이 발표한 ‘기후변화 여론과 최근 대통령선거’ 보고서는 지난 2020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주요 요인 중 하나를 기후 이슈로 분석하며 “3%의 유권자가 기후 이슈 때문에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2022년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이유도 기록적인 산불과 홍수가 발생하면서 기후위기 대응을 주요 의제로 들고나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021년 독일에서는 홍수로 2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녹색당은 118석이라는 역대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다.
■ 준비된 정치집단 있어야
국내 정치권에서 기후위기는 여전히 주요 의제가 아니다. 서복경 대표는 “원내정당들은 지도자급 수준에서 기후 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집담회에 참여한 정치인은 김용태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이동학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녹색정의당 인재영입 1호인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오준호 새진보연합 정책본부장이었다.
서 대표는 “기후의제를 선도하는 유럽 국가들도 처음에는 작은 정당이나 큰 정당의 소수 그룹에서 목소리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류의 목소리가 아니어서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각 정당에 기후정치를 준비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5~10년 안에 기후 이슈는 가장 상위의 정치 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기후변화의 변량이 커지면 기존에 있는 재난 대응 시스템이나 복지 인프라로는 대처가 안 될 것이고, 중앙정부부터 각 동의 행정조직까지 굉장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라며 “준비된 정치집단이 있어야 시민들이 기후재난으로 고통받고 기업들이 에너지전환 문제로 세계시장에서 밀려날 때 국가적 수준에서 대응을 할 수 있다.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우왕좌왕하다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