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박근혜 관심사업 ‘묻지마 예산’

DMZ평화공원 등 공약사업 아무 근거도 없이 내년 예산에 무리한 편성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사업들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산이 편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법적·제도적 뒷받침도 없이 사업이 예산안에 포함돼 사업 실행 자체가 불확실한가 하면 기존 사업과 중복되는 사업도 있었다.

또 대통령에 대한 자문으로 역할이 한정돼 있는 자문기구에 법적 근거도 없이 직접 사업 예산까지 배정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른바 ‘박근혜표 예산’이 무리하게 배정되면서 타당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 공약했던 전자정부 구현, DMZ 세계평화공원 건립, 행복주택 건설 사업 등은 관련 법령이 없는 등 아직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데도 내년 예산에 편성됐다.

안전행정부(안행부)는 전자정부 구현사업의 일환으로 범죄 발생 최소화 시스템 구축사업과 주민참여형 교통사고 감소체계 마련 사업을 내년부터 추진한다. 사업 예산은 50억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 16일 청년위원회 위촉장 수여식을 마치고 남민우 위원장(오른쪽 앞)과 함께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경찰청의 시범과제로 실시하는 이 사업들은 중앙부처·공공기관 및 민간기관이 보유한 CCTV 영상자료를 수집해 범죄 발생 예측시스템과 교통사고 감소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는 관련 법령조차 검토하지 않고 이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행법 어디에도 민간인이 CCTV 자료 등 민간 데이터를 정부에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도 CCTV 정보를 함부로 수집해 중앙정부에 제공할 수 없다. 사생활 보호문제 때문이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CCTV 등에 개인의 사생활 같은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있을 경우 정보처리자가 최소한의 개인정보만을 수집하도록 돼 있다. 사업 수행을 위한 기본 자료인 데이터 확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만큼 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법령 검토도 않고 ‘일단 끼워넣고 보자’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백재현 의원(민주당)은 “만약 민간기관이 데이터를 정부에 제공하지 않으면 사업 자체를 진행할 수 없다”며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우선 예산부터 투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가 추진하고 있는 DMZ(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 사업도 첫 삽을 뜨기에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통일부는 비무장지대 내에 남북한 및 유엔 등 국제기구가 참여하는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내년부터 시작한다. 내년 예산만 402억원이며,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총사업비 2500여억원이 들어간다. 그러나 DMZ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서는 북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남북관계는 여전히 경색돼 있다.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남북간, 유엔사-북한간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부가 박 대통령의 공약인 DMZ 평화공원 사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최근 북한 핵문제, 이산가족 상봉행사 연기 등 남북관계가 경색돼 남북이 합의를 도출하기까지는 상당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며 “사업 착수 시기가 불확실한 만큼 공원 조성과 관련한 예산을 미리 반영할 것이 아니라 추이를 지켜보면서 단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국토부)는 박 대통령의 공약인 행복주택을 건설하기 위해 총 9530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국토부는 신혼부부·사회초년생·대학생 등에게 행복주택 5만6000호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 행복주택 지구가 지정조차 되지 않는 등 정부의 계획대로 실현될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행복주택지구 지정이 완료된 지역은 전체 7개 지구 중 2개 지구에 불과하다. 특히 공릉·송파지구 등 아직 지정되지 않은 5개 지구는 주민들이 행복주택건설에 반대하고 있어 사업의 빠른 시행도 쉽지 않다.

지정된 2개 행복주택지구도 철도역사 부지인 국유지에 위치해 있다. 아파트 입주자에게 토지소유권이 없으므로 민간분양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시공사인 LH공사의 부채만 늘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LH공사의 한 관계자는 “철도부지에 행복주택을 지을 경우 주택건설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고, 공사 시 위험성도 높다”며 “국토부가 편성한 예산이 평당 건설단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LH공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새로 만들어진 대통령의 자문기구인 청년위원회와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월권 예산 편성’을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들 기구의 역할이 국민으로부터 의견수렴이나 대통령 자문 역할에만 국한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직접 사업까지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문기구에도 대규모 ‘월권 예산’
청년위원회의 내년 예산은 63억600만원이다. 청년위는 청년순례(5억원), 청년진로 EXPO(5억원) 등 청년 일자리·인재양성 및 청년소통 사업으로 22억8000만원을 사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청년위가 이런 사업을 직접 추진하는 것은 근거법령상 위원회의 기능 및 설립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관련 부처 사업과도 중복될 우려가 있다.

청년위의 근거 법령인 ‘청년위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르면 청년위의 기능은 일자리 창출, 인재양성 등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것으로, 청년위가 일자리 창출 등 관련 사업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근거는 법령에 없다.

또한 청년위가 계획하고 있는 청년진로 EXPO 사업은 고용노동부(고용부)와 중소기업청(중기청)의 사업과 유사하거나 중복된다. 청년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소개하고 진로 체험 신청 시 멘토를 배정해주는 사업인 청년진로 EXPO는 고용부의 청년강소기업 프로그램,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등과 중복되며, 중기청의 벤처·창업 박람회 등과도 유사하다.

또 다른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는 예산이 무려 95억8500만원이나 된다. 이는 비슷한 기능을 한 이명박 정부 때의 사회통합위원회 예산(42억9000만원)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것이다.

국민통합위의 내년 사업 중 눈에 띄는 것은 국민대토론회 개최다. 8억원이 배정된 이 사업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사랑방·원탁·인터넷·TV 토론 등 여러 과정을 거친 후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민통합위의 의도대로 특정 주제에 대해 온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논란만 더 키울 수 있으며, 전시행정으로 비쳐질 가능성도 높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문병호 의원(민주당)은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참여정부의 자문기구가 자문만 해야 하는 데 많은 예산을 쓰고, 정책 결정에 집행까지 한다고 비판했다”며 “참여정부의 자문기구 예산이 방대하다고 강하게 질타했던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자문기구에 대해 대규모 예산을 편성한 것은 자기 모순”이라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