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반란은 '연습'되고 있었다

교련복으로 갈아입은 학생들이 학군단 앞에 모여든다. 삼삼오오 잡담을 하며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반란의 기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목총을 수령하러 갈 시간. 엉성하게나마 대오가 갖춰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기고로 가던 대열이 슬그머니 방향을 튼다.

어, 어, 하는 사이에 학생들은 점점 교련 교육장에서 멀어진다. 구호도 노래도 없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나 바람잡이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대열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학생회관으로 내려가 식당 앞에서 멈춘다. 허, 허, 허! 여기저기서 너털웃음이 터진다. 그리고는 각자 흩어져 식당으로 들어간다.

1977년 4월 서울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단적으로 교련 수업을 받지 않고 점심을 먹으러 간 사건이다. 아무런 주장을 한 게 아니니 시위도 아니고, 사전에 계획하거나 주동한 사람이 없으니 불법 집단행동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전원 결석 처리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우로 봐' 구령에 '좌로 봐'

비슷한 일이 그 전에도 있었다. 1975년 11월 19일 사회대 학도호국단 사열식 때였다. 단장(총장)에 대한 '받들어 총' 구령이 떨어졌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윤천주 총장이 9번이나 다시 명령하도록 했으나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사열식 때는 '우로 봐' 구령에 일제히 '좌로 봐'를 했던 사건도 있었다.

반란은 이미 '연습'되고 있었다. 1977년 봄 두 차례 '5분시위' 후 뒷일을 책임지기로 했던 김창우(전 부산지역일반노조 집행위원)가 구속된 뒤 관악 운동권은 지도부 공백 상태를 맞았다. 그러나 장수가 없다고 해서 부대가 오합지졸이 된다는 법은 없다. 내부에서 더 유능한 인물이 부상할 수도 있고, 예상치 않던 곳에서 의병이 궐기할 수도 있다.

1977년은 서울대 사회학과 창설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사회학과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가을 축제 무렵에 개최하기로 하고 봄부터 준비를 했다. 사회학과는 이철(17대총선 부산 북강서갑 국회의원 후보-열린우리당)-유인태(현 열린우리당 의원)-이해찬(현 국무총리) 등 학생운동 거물을 배출한 '데모학과'로 전통이 있었다. 30주년 기념행사를 주도할 3학년(75학번)에도 운동권이 두텁게 포진해 있었다.

그런 만큼 이 행사는 학교 당국과 기관원은 물론 그 반대편에 있는 학생들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사회학'이라는 심포지엄 주제도 '섹시'했다. 김석준(현 부산대 교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위원장)-조희연(현 성공회대 교수)-심상완(현 창원대 교수) 등이 주제발표자였고, 과 대표인 피정선(현 국제화학에너지노련 아태지역 사무처장)과 총무인 박홍렬(현 관악민주포럼 운영위원)이 행사 실무 책임자였다.

이들 대부분은 한사-사복회-아카데미 등 이념서클에 소속된 의식분자였다. 당연히 준비 단계에서부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양쪽 진영의 관심이 집중됐다. 사찰 기관에서는 이들이 시위를 벌일지 여부를 탐색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웠고, 운동권은 심포지엄 공간을 이용해 거사할 방도를 찾느라 머리를 싸맸다.

주최측도 신경이 곤두서긴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심포지엄 공간을 활용해 시위를 할 팀이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들은 교외에서 합숙토론을 하는가 하면 행사 직전에는 봉천동 여관에서 최종 리허설을 했다. 이들 가운데는 "그 자리를 단순한 발표회로 끝내긴 아깝다"며 "준비한 팀이 없으면 우리라도 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한 학술토론회에 국한해야 한다"는 반대가 있어 '주최측 거사' 시나리오는 일단 유보됐다.

이런 팽팽한 신경전 속에 심포지엄 날인 10월 7일이 밝았다. 심포지엄은 이날 오후 2시부터 26동 대형 강의실에서 열리게 돼 있었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날 심포지엄 공간에서 시위를 벌이려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팀은 없었다. 주최측은 현장에서 판단하기로 했고, 74~75학번 운동권에서도 거사를 모의한 팀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는 없었던 것이다.

원인은 다른 데서 제공됐다. 그냥 놔뒀으면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 행사인데 학교 당국이 과잉 단속에 나서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심포지엄이 열리기 직전 학교측이 갑자기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행사장으로 가려던 발표자와 진행자도 교수들이 나서서 억류해버렸다.

부글부글 끓어 오른 청년들

사제간에 승강이를 벌이는 사이에 26동에는 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심포지엄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최측 학생은 원고 없이 주제발표를 하기로 한 심상완과 실무 준비를 맡은 박홍렬 둘뿐이었다. 그런데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발표자들이 나타나지 않고 이들이 학과 사무실에 연금돼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발표자들을 풀어주라!"

"심포지엄을 속행하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구호가 터져나왔다. 교련 시간에 단체로 점심 먹으러 간다거나 '우로 봐' 구령에 '좌로 봐'했던 것처럼 '반란 연습'이 충분히 돼 있던 터다. 1년 전 '동(주동자)' 없이 데모한 '감나무골 사건'을 이미 경험한 바도 있었다.

26동에는 다양한 학생이 와 있었다. 기회를 봐서 사건을 만들어보려는 적극행동파, 뭔가 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온 의식분자, 민족운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진 순수 학구파 등 각양각색의 학생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생 일반의 정서를 뜨겁게 달군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그 전 해 12월과 그해 봄 시위로 구속된 선배그룹의 재판 방청이었다. 김창우의 구속으로 게릴라식 시위를 이어갈 동력을 잃어버린 운동권에서는 각 서클이 조직적으로 후배들을 법정에 동원했다. 이들은 재판정에서는 선배들의 법정투쟁을 응원하고, 끝나고 나오면서 경찰의 압박에 대항하고, 돌아와서는 막걸리로 뒤풀이를 하면서 응어리를 풀었다. 그 과정이 일종의 반란 연습이었던 셈이다.

또 하나는 76학번을 중심으로 일어난 학도호국단 간선제 논의였다. 학도호국단 간부는 임명제였다. 비록 현실타협적인 발상이지만 이런 논의를 통해 학생들의 뜻을 모아보자는 얘기가 '방청투쟁' 후 뒤풀이 과정에 오갔다. 내부적으로 간선제 하의 사회대 학생회장 후보로 꼽힌 김부겸(현 열린우리당 의원) 등 76학번 그룹이 간선제 쟁취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연성만(당시 인문대 학보 편집위원, 현 그린콜닷컴 이사) 등 75학번으로 구성된 각 단과대 학보 편집실 대표 모임이 이를 뒷받침했다.

이들은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10월 5일 총장을 면담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질 리 만무였다. 긴급조치 9호 시대에는 그런 행동 자체가 불순한 것이었다. 돌아온 것은 서명을 주도한 학생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이런 일들이 이틀 후 26동에 모인 학생들의 내면을 부글부글 끓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가릴 것 없이 그 점에서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인문대 철학과 75학번 홍윤기(현 동국대 교수). 그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현실 비판의식도 그리 강하지 않은 '모범생'이었다. 강릉의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한 가지 소박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군대에 안 가도 되는 만큼 최단기간에 박사학위를 따는 것이었다.

사회대 경제학과 75학번 김용관(현 성균관대 교수)과 박관석(현 목포대 교수). 김용관은 국경회, 박관석은 한사 소속의 의식분자로 고교(광주일고)-대학-학과 동기이기도 했다. 경제학과에는 광주일고 20회 동기생이 7명 있었는데 이들과 부윤경(현 삼성물산 화공설비팀 부장)-백삼철(현 목동 와이즈만 학원장) 등 4명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들의 광주일고 1년 선배(19회)는 사시-행시에 80여명이 합격하며 기염을 토하지만 이들 기수는 거꾸로 그 숫자만큼 감옥에 간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26동에 간 목적만큼은 '순수한' 심포지엄 참관이었다.

심포지엄 진행을 담당한 박홍렬의 경남고 1년 후배인 75학번 강천(현 부산외대 교수)은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경제학도였다. 당시 그는 행시를 준비할 것인지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26동을 찾은 것은 순전히 학술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투사'로 돌변한 학구파

26동에는 의식분자도 많이 모여들었지만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이런 순수 학구파들이었다. 학교측이 예기치 않게 심포지엄을 '연기'하는 바람에 '투사'로 돌변한 이들이다. 현장에 미리 와 학과 사무실에 연금되지 않은 심상완-박홍렬이 사태 수습을 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각자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놓고 있던 생각을 쏟아놓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26동 사건의 제1피고인이 되는 홍윤기의 말을 들어보면...

"갑자기 철학과 후배가 사회를 보겠다며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지금부터 내가 지명했는데 발언하지 않는 사람은 관악 학우로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에 대학논문상을 받아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며칠 전 그 후배와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시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 당시는 누구나 '이대로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는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홍윤기 선배, 일어나 발언하시오'라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그는 그동안 나온 발언들을 정리했다. 10월 5일 과대표들이 총장에게 전달한 학도호국단 자율화에 관한 건의를 수락할 것,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9명의 학생에 대한 징계 절차를 즉각 중지할 것, 학보와 대학신문에 대한 지나친 검열을 중지할 것 등이 그의 발언 내용이었다.

이를 기화로 26동은 농성체제로 들어갔다. '총장 물러가라' '학원 자유 보장하라' 등의 구호가 '긴급조치 해제' '유신헌법 철폐' 등으로 수위가 높아졌다. 학생들은 '선구자' '정의가' '강변에서' '스텐카라친' 등을 불렀고 '각설이 타령' '나의 조국'을 개사한 노래도 함께 불렀다. 농성은 오후 7시 30분 경 26동에 있던 학생 400여명 전원이 경찰 포위 속에 연행될 때까지 계속됐다.

연행된 학생들은 A, B, C급으로 분류됐다. A급으로 분류돼 구속된 학생은 8명이었다. 이 가운데 홍윤기-박홍렬은 주범으로 지목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1년 6개월, 심상완-김용관-박관석-강천은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받는다. 교련 수업을 받고 뒤늦게 26동에 들어왔다가 구속된 2학년생 최상일(현 문화방송 라디오본부 CP)-전경재(현 한양대 교수)도 같은 형을 받는다.

박홍렬-심상완은 심포지엄 주최자로서 사회를 보면서 학생들을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 주범으로 지목된 이유였다. 박홍렬은 아카데미 회장으로서 그해 여름 농활을 다녀와 [대학신문] 좌담회에 나가는 등 이미 신분이 드러나 있었다. 심상완도 사복회 소속으로 당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어 감시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시위를 주동할 그룹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심상완은 뒷날 운동권 노래 보급에 큰몫을 한 노래모임 '메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1977년 심상완-조희연-이경호 등이 만든 '메아리'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대학 노래 모임 '새벽'과 거기서 갈라져나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모태이기도 하다. 메아리는 그가 구속된 뒤 질적-양적 발전을 거듭해 경영학과 김창남(현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정치학과 문승현(현 경희대 음대 교수), 경제학과 한동헌(전 씨네21 대표), 농대 김보성(현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대학장) 등과 같은 쟁쟁한 전업 노래운동가를 배출하게 된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26동 사건 당시 김용관은 결의문을 작성하고 박관석은 이를 낭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박관석은 "그때 용관이는 개입하지 않았고 부윤경이 앞에 나와 있었다"며 "친구 이름을 얘기할 수 없어서 자기가 감옥에 간 것"이라고 최근 술회했다. 그는 "그 부채를 짊어지고 나중에 윤경이가 감옥에 갔다"고 덧붙였다.

최상일은 홍윤기가 발언할 때 박수를 치며 호응하고, 심상완과 함께 "나가지 말고 계속 머물러 있자"고 말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받았다. 농법회 소속인 그가 서울구치소에 갔을 때 먼저 수감돼 있던 서클 선배 양춘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구속은 그를 아는 많은 선배-동료에게 충격을 주었다.

대학이 학문의 싹을 자른 꼴

이 사건 관계자에 따르면 가장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강천-전경재다. 강천은 조사 과정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형사의 요구에 불응하는 바람에 C급에서 B급으로 바뀌었고, 계속 모욕적인 언사를 해대는 형사에게 항의하는 바람에 다시 A급으로 등급이 상향조정됐다. 전경재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느냐"는 추궁에 곧이곧대로 시인한 것이 A급 판정을 받은 연유였다. 그는 "당시 경찰은 개사한 노래의 작사자를 찾는 데 혈안이었다"며 "다른 친구들은 부인했는데 내가 노래를 불렀다니까 작사자로 지목한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세월은 26동 사건에 대한 단죄가 잘못임을 증명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대학이 학문을 가로막고 사법 당국이 학문의 싹을 자른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26동 사건 공범 8명 중 6명은 투옥의 역경을 딛고 공부를 계속해 학계로 진출했다. 예정대로 심포지엄을 하게 했다면, 그래서 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홍윤기는 최단기간 박사학위의 꿈을 실현하고 다른 사람들도 더 일찍 학문적 성취와 발전을 이뤘을지 모른다.

언론계로 나간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박홍렬은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까지 마쳤지만 아직 학문적 포부를 펼칠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최상일은 언론계로 가 전국을 돌며 구전민요 1만여곡을 찾아내 집대성한 학술적 업적을 쌓았다. 설사 긴급조치 9호가 정당하다 치더라도 사람을 잘못 집어냈음을 26동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당시 관악 운동권의 심사가 오죽했으랴. 특히 졸업을 앞둔 74학번 의식분자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후배들을, 그것도 감옥에 가지 말아야 할 팀을 먼저 보냈으니... 74학번 리더 김경택(현 온샘미디어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답사여행에서 돌아오던 국사학과 75학번 연성만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